[여성시대] 사장에게 ‘뇌물’ 받는 여성

이시영-탈북민 xallsl@rfa.org
2024.09.09
[여성시대] 사장에게 ‘뇌물’ 받는 여성 동대문시장
/연합뉴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오늘 시간에는 신분 사회 북한에서 태어나 남녀평등을 내세우지만 늘 사회 약자로서 간부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살아가던 제가 이곳 대한민국에서 당당한 여성으로 사랑을 받으며 오히려 사장님에게 뇌물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북한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한국에 살면서 여성으로서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답니다. 정착 초기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 시내에 있는 동대문시장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시간제 일을 했는데요. 당시 의류 부자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회사에는 10명의 직원이 있고 사장님과 실장님 경리가 모두 여성이고 이하 대리, 과장, 주임은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인천하인 거죠.

 

북한 사투리를 빵빵해대는 신기한 나라에서 온 저를 직원들은 친절하게 배려해주셨고, 궁금한 북한 이야기가 있으면 묻기도 했는데요.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이곳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조금씩 다르다 보니 저는 자연히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탈북할 때의 초심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었고 금방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파악했지요.

 

이곳에 정착하는 탈북민들은 마음속 깊이 소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하는데요. 탈북민 개개인의 행동과 언행이 북한에 남겨진 친구들을 바라보는 남한 주민들의 시선이기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답니다.

 

북한에서는 고무줄이라 하지만 이곳에서는 스트링, 맞단추를 스냅, 쩝쩝이를 벨크로 테이프, 비료도 천을 벨벳 원단이라고 합니다. 청취자님들도 당황하셨죠? 저도 처음에는 엄청나게 당황했는데 제가 누굽니까?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은 탈북 여성인데 이정도에 힘 빠지면 안 되지요.

 

정말 낮에는 일하고 저녁이면 물건들의 이름을 외우고 한달이 지나니 사장님도 실장님도 너무 칭찬을 해주시고 두달이 지나니 탈북민 중에 함께 일할 사람이 없냐며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하자고 격려도 해주셨답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한주일이 지났을 무렵 사장님이 저에게 내일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하셨어요. 그날 밤 저는 한숨도 못자고 속상했답니다. 이유는 북한에서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문건을 쓴다고 하면 가족관계를 쓰잖아요. 신분사회 북한에서 태어나 한번도 문건을 쓴다고 할 때 당황한 적 없이 술술 써내려가던 제 처지가 이곳에서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답니다.

 

아버지도 사망, 동생도 사망, 고향은 북한, 뭐 하나라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그야말로 무산자인걸요. 온밤 고민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회사에 나갔는데요. 그날 저는 인간의 평등함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에 감사했고 이런 세상에서 정말 열심히 살리라 마음먹었답니다. 근로계약서를 내미는 실장님의 손에서 조심히 받아 읽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가족에 관해 묻는 한마디 문구도 없었고 회사에서 직원에게 보장해 줄 수 있는 혜택들만 적혀 있었답니다.

 

한달 급여는 얼마이고 식비는 얼마이고 교통비도 있고 장려금도 있고 격려금도 있고요. 그리고 한달에 한번 월차도 사용하고 여름휴가도 사용해야 하고, 세상에 생리통이 있어도 휴가를 쓸 수 있다니 북한이라면 만세를 부르고 싶었답니다.

 

온밤 고민한 제가 얼마나 민망하던지, 자신 있게 서명을 하고 더 열심히 일했답니다. 두달이 지나니 사장님이 급여도 올려주고 매달 급여를 탈 때마다 이렇게 돈을 벌게 해주신 사장님께 뇌물이라도 사드려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답니다.

 

하지만, 너무 큰 고민은 이쁜 옷에 이쁜 신발에 멋진 차를 타고 다니시는 사장님 수준에 맞는 뇌물을 마련하려면 저의 한달 급여를 다 드려도 모자랄 것 같다는 마음이었죠. 당시 저의 한달 급여가 $1,800 달러 정도였는데요. 북한이라면 큰돈이지만, 한달에 수십만 달러를 버시는 여사장에게 드릴 선물을 사기에는 부족한 돈이라 생각했죠.

 

그러다 추석 명절이 다가왔답니다. 저는 추석 명절을 맞는 사장님에게 뇌물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 출퇴근 길에 상점도 들려보고 백화점도 들려봤지요. 추석이 다가오는데 사무실에 여기저기에서 과일 상자와 과자, 사탕 상자가 배송되더라고요. 잘사는 나라에 오니 과일도 통째로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날도 퇴근 준비를 하는데요. 사장님이 직원들을 모두 모이라고 하셨어요.

 

무슨 일인지 몰라 저는 맨 마지막에 조심히 서 있는데 직원들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밝아 보였고 신나 보였답니다. 실장님부터 대표님 방에서 나오는데 생글생글 웃으시더라고요. 참 이곳에서는 사장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대표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 차례가 되어 저도 사장님 방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사장님이 북한에서 어렵게 온 시영이가 인연이 되어 회사와 함께 일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추석 명절을 즐겁게 보내라고 글쎄 돈 봉투를 건네시더라고요. 황송하다는 말의 뜻을 그날 아마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눈물이 핑 돌면서 북한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선생님과 간부들에게 뇌물만 바치던 제가 사장님에게서 뇌물을 받게 될 줄이야 가슴이 먹먹하면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답니다. 당황하여 저는 선물을 준비 못했는데 이렇게 받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사장님이 너희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회사 매출도 오르고 신용도 올랐으니 당연히 사장이 한턱내야 하는 거라고 갈 때 과일도 한상자 가지고 가라고 하셨답니다.

 

여성들이 남자와 동등한 오히려 남자보다 더 인정받으며 사는 이곳에서 멋진 여사장님을 만나 나도 나중에 사장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는데 이렇게 멋진 사장님이 저에게 추석 선물을 주시다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지요.

 

청취자분들은 봉투에 얼마가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저도 물론 궁금했답니다. 방에서 나와 책상에서 몰래 봉투를 열었는데 글쎄 $500달러나 들어있었어요. 세상에 대박대박 이런 대박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날 무거운 과일 상자를 들고 지하철을 타는데 맨몸에 퇴근하던 날보다 더 빨리 날아서 집으로 왔답니다.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모두 들으시고 딸들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기 너무 잘했다고 이런 좋은 세상에서 남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답니다.

 

그 후로도 사장님은 일을 잘하면 늘 격려금을 챙겨주셨고 저는 그것을 받는 재미에 주말도 열심히 일했죠. 6개월 후 급여도 훨씬 올랐고 사장님은 앞으로 여성으로 네가 일을 잘 배우면 사장도 할 것 같다는 힘을 주셨지만 저는 급여가 더 높으면서도 북한주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회사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가끔 사장님을 만나 소주 한잔하면서 그때 기분을 떠올리는데요. 늘 고마웠던 마음을 간직하고 존경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저도 사장님께 맛있는 밥 한끼는 사드리는 그리고 생일선물도 드리는 능력이 좀 되는 여자가 되었답니다. 언제면 남한과 북한의 능력 있는 여자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될지 오늘도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자유아시아 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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