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행복하고 배불러 미안합니다.

이시영-탈북민 xallsl@rfa.org
2024.09.02
[여성시대] 행복하고 배불러 미안합니다.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어울림 마당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의 날 행사장 전경.
/RFA PHOTO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자유대한민국에서 이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탈북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중반 시작된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생활전선에서 북한 여성들은 늘 자신의 행복은 뒤로하고 온몸을 불태웠죠. 이동의 자유가 없는 그곳에서 늘 출장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장사 짐을 운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뇌물을 바쳤고 웃음을 팔았고 안전원들에게 농락당했지요

 

하지만, 지금 자유를 찾은 탈북민 여성들은 자유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이동의 자유와 여성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있답니다. 며칠전 언니들이랑 저는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자가용 차를 타고 무작정 꽃구경을 떠났습니다.

 

3 4천 명 정도의 탈북민 중에는 여성이 70%를 차지할 정도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요. 그 속에서 자가용 차가 없는 여성을 찾으려면 10명도 못찾을 만큼 이곳에서 우리는 가고 싶은 곳까지 자가용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추억은 함께 웃고 떠들며 다니는 게 재미잖아요. 그래서 언니들과 저를 포함 4명의 여자는 언니의 차로 함께 이동하게 되었는데요. 언니 차는 SUV,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사파리 차량이랍니다.

 

시원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언니의 차는 에어컨 바람은 물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차안에는 여름 날씨에 맞추어 반바지에 이쁜 블라우스를 입은 북한이 고향인 여성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의 추억을 떠올렸답니다.

 

이곳에서도 이동하기 위해 여성들이 꼭 준비해야 하는 게 있는데요. 청취자님들이 한번 알아맞혀 보실래요? 여성들이 장거리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필수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대비하여 선크림, 선글라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소중한 추억은 이쁜 사진으로 남겨야 하니 셀카봉, 그리고 건조하면 피부가 망가진다고 하니 향긋한 미스트는 필수랍니다.

 

북한에서 여성들은 여행 한번 제대로 못 하지만 그나마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며칠 전에 출장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전날부터 도중 식사를 준비하고, 장사물건을 포장하고 열차표를 구매한다고 야단법석이죠.

 

화물차 적재함에서 짐과 함께 이동하다 군인들과 안전원들에게 단속당하고 짐을 검열받고 국경지역에서는 마약을 잡는다고 큰 수색견까지 만나야 하는 끔찍한 추억이 아직도 저의 눈앞에 선합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되다 보니 추억들이 하나둘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지금도 어려움에 시달리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만 간답니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언니네 아파트에 모인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니 차로 옮겨 탔지요. 왕복으로 운전을 혼자 하면 언니가 피곤하니 서로 교대로 운전하기로 약속하고 운전자 1일 보험에도 가입했답니다. 북한에서는 당에 검열받기 위한 서류가 필요하다면 이곳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서류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큰언니는 아침을 먹지 않은 우리를 생각하여 빵과 커피를 준비했고요. 저는 아침에 먹는 사과가 보약이라니 냉장고에 있는 사과랑 포도를 챙겨갔답니다. 출발부터 먹거리로 배를 채우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는 동생에게 오늘은 다이어트를 하지 말고 많이 먹으라고 했죠. 하지만 날씬한 허리선은 포기할 수 없다는 동생 말에 오늘도 우리는 탈북하기 참 잘했다고 한바탕 웃었답니다.

 

북한이라면 상상이나 할 일인가요? 출발과 동시에 기쁨이 가득한 우리의 여행에 방해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다만 도로에 꽉 막힌 차들 때문에 쌩쌩 달릴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튤립이랑 가시가 돋친 장미랑 산을 이루고 있는 꽃밭부터 찾았는데요. 북한에서 태어나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면서도 늘 한쪽 마음에는 고향에서 고생할 친구들을 떠올리곤 했답니다.

 

꽃구경에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엄청 찍고 나니 배가 슬슬 고파오기 시작했어요. 주변에 매콤한 낙지볶음을 잘하는 식당이 있다고 동생이 말했고 식당으로 차를 몰고 갔더니 주차를 해주시는 어르신 한분이 계셨답니다. 자동차 열쇠를 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매콤하게 코를 자극하는 낙지볶음 냄새가 다이어트도 잊게 했죠.

 

맛있게 먹고 신나게 호텔에 들어왔는데 언니들은 짐을 풀고 바로 수영하러 수영장으로 간답니다. 북한에서 잃어버린 40, 이곳에서 더 자유롭게 다니며 맘껏 누리겠다고 약속한 언니들이라 여행을 가면 동생들보다 두 배 세배로 즐기는데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허리까지 기른 탐스러운 머리카락이며 날씬한 허리며 하얀 피부와 손톱과 발톱에 이쁘게 바른 매니큐어까지 북한에서는 사상투쟁회에 오를 비사회주의 원형이었답니다.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불빛 화려한 거리의 호프집에서 우리는 닭튀김과 맥주 한잔씩 하고 숙소로 돌아왔고 폭신한 침대에서 꿈나라로 향했습니다. 그날의 여행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에 고마움과 감사함을 심어주었답니다.

 

서울을 떠나 수십 킬로를 달리는 도중에 우리 차를 세우고 주민등록증을 검열하는 사람도 짐을 보자는 경찰도 없었습니다. 온전한 이동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북한을 떠나서야 올바로 알게 되었고, 인간으로 태어나 누리며 사는 수 많은 자유를 알지도 못한 채 북한에서 불안하게 흘려보낸 20대 청춘 시절이 너무도 아깝고 후회가 된답니다.

 

오늘도 이곳에서 이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탈북 여성들은 늘 행복해서 미안하고 배불러서 미안합니다. 언젠가 우리 함께 누리게 될 이동의 자유를 오늘도 간절히 꿈꿔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자유아시아 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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