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탈북민의 아버지

김태희-탈북자
2024.04.15
[여성시대] 탈북민의 아버지 지난 2015년 부산 해운대구 동부산대학교 잔디운동장에서 열린 탈북민 합동결혼식 모습.
/연합뉴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예전부터 딸은 시집을 가면 도둑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탈북민 우리에게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이기에 친정에 가서 무엇을 가져오고 싶어도 갈 친정이 없네요. 부모님과 함께 온 사람이면 친정에 갈 수가 있지만 나처럼 홀로 한국에 온 경우에는 갈 수 있는 친정도 없고 같이 사는 남편도 처가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하면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늘 궁금해합니다.

 

그런 나에게도 한국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인해서 친정이 생겼습니다. 8년 전 나는 탈북민에게 간을 제공해주면서 남편이 나에게 웨딩드레스를 꼭 입혀준다고 깜짝 선물로 부산의 명소인 광안리에서 야외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아껴 주시던 한 목사님이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가 아버지 대신해주겠다고 해서 팔을 끼고 결혼 예식장에 함께 걸어 들어가 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아버지와 딸로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한국은 결혼식이 북한처럼 가정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식장에서 진행되는데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가 친정아버지 손을 잡고 축하 음악에 맞춰 입장을 하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 부모님이 안계시니 동시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기로 했었습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알고 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분께서 아버지를 자청해 주신 겁니다.  

 

그때의 인연과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우리는 늘 아버지를 뵈러 자주 놀러 갑니다. 양아버지이지만 생전에 내 아버지처럼 학식도 있고 특히 교사를 지내신 것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시는 것도 닮으셨는데 체격과 모습조차도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양아버지이지만 생전에 살아 계신 친정 아버지처럼 정이 가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도 아버지를 장인어른이라고 깍듯이 모십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사모님은 우리와 나이 차이가 10년도 채 안되는 터라 차마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사모님이라고 부릅니다.

 

남편은 아버지 집에 손이 가야 할 것들이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또 사모님도 아버지도 우리를 챙겨주려고 노력을 하고 계시죠. 내가 가면 늘 냉장고도 니 맘대로 열고 먹고 싶은 것도 먹어라, 여기는 뭐가 있고 또 저기는 뭐가 있고 이러면서 아버지는 늘 내가 아버지 집에 오면 서먹하지 않게 해준답니다. 어제도 문뜩 사모님한테서 집에 놀러 오라고 연락이 왔네요.

 

녹취: 그러면 차나 한잔 하시게 오세요(웃음

 

이제는 내가 없어도 사모님과 남편이 서로 약속을 잡고 하더군요. 그래서 찾아간 아버지 집에 갔더니 맛있는 차와 다과를 내놓고 한참을 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아버지가 집안에 보물들 자랑을 하십니다. 예전에 유명한 화가가 그려줬다는 병풍이며 그림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마음 드는 것이 있으면 몇점 골라가게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사모님이 장롱 깊이 건사했던 그림들을 내놓네요.

 

남편이 그림을 보는 눈이 있어서 그림 두 점을 골랐군요. 한점은 피어나는 매화꽃이고 다른 한점은 러시아에 선교활동을 나가 계시는 선교사님이 아버지가 목사님으로 계실 때 가죽에 그려주고 직접 액자까지 만들어서 이름까지 새겨 주신 참 귀한 가보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집안 구석구석 둘러보고 나는 예쁜 꽃이 활짝 피어난 호접란이 이쁘다고 달라고 했네요. 사모님은 꽃 중에서도 가장 이쁘게 핀, 앞으로도 꽃이 필 꽃봉오리가 가득한 건강한 화분으로 하나 챙겨줬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선물을 하나 주시네요. 한때 한국에서 유행이었던 커다란 수석을 챙겨 주십니다. 이런 것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정도로 인기가 참 많았던 것들입니다. 차를 마시면서 두어시간 앉아 있다가 정작 집에 오자고 보니 한번 움직여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이 무거운 수석을 들어서 차에 한번 넣어놓고 올라와서 커다란 그림 두점과 화분 등을 챙겨서 차로 왔습니다.

 

돌아오면서 남편과 둘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옛날에 시집간 딸이 친정만 가면 가지고 갈 궁리만 한다고 하더니 내가 양아버지 집에 가서 구석구석 살펴보고는 귀한 물건들을 하나 둘 우리 집에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년전부터의 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주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랍니다. 그런 아버지가 계시기에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친정집이 없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아버지와 내가 함께 팔을 끼고 찍는 사진을 보고 말합니다. 어떻게 저런 대형 교회에서 유명하신 목사님이 탈북자 딸을 둘 수가 있냐고, 진짜 아버지와 딸이 맞냐고 물어보지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화가가 만들어준 이름이 적힌 그림을 보여주면서 아버지 집에서 벗겨온 그림이니 이것도 못 믿겠냐고 하라고 하시네요.

 

우리말에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근본이 없는 우리 탈북자를 딸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어디에서나 진심은 통한다고 하지요. 비록 핏줄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진한 정으로 그리고 진심을 가지고 아버지와 사모님 그리고 남편과 나 이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가족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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