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남한의 귀 간지러운 이쁜말

이시영-탈북민 xallsl@rfa.org
2024.10.28
[여성시대] 남한의 귀 간지러운  이쁜말 삼척시 보건소에 배달된 도계장애인 보금자리의 손편지. [삼척시 제공]
/연합뉴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 여성들이 봄을 타는 이유는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다 보니 여성들이 설레는 마음이 한층 더 높아져 기분이 산들산들해진다고 합니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하는 이유는 가을의 단풍잎과 낙엽들은 남자들에게 더 진한 여운을 남긴대요. 또 가을바람에 코트의 깃을 세우고 혼자 걸어가노라면 남자들은 설렘보다는 쓸쓸함과 고독을 느낀다고 해요.

 

대한민국 정착 초기에는 계절이 뭔 썰매라고 타냐고, 살기 편하니 별말을 다 한다. 이렇게 정 없던 시영이는 최근들어 부썩 간질거리는 멘트를 잘 날린답니다.

 

북한에서 늘 타인을 경계하고 감시 속에서 숨기고 긴장하게 살던 제가 이제야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여성으로서의 감성이 생기나 봅니다. 북한에선 남자친구에게 사랑해라는 말보다 좋아합니다.’라고 말했고 오늘도 고생했어.’ 보다는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잘해라는 말을 하던 저였거든요.

 

하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인간의 온전한 본성을 찾게 되고 타인에 대한 솔직한 배려와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위로하면서 부끄럽지만, 이제야 시영이가 사람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주변분들도 처음보다는 제가 너무 여유가 생겼다고, 얼굴의 웃음이 편해졌다고 말하곤 합니다.

 

저도 느끼지만요. 최근에는 친구들에게도 서슴없이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요. ‘오늘도 고생했어 넌 잘할 거야라는 말도 마구 날린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결함을 꼭 집어 말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 속에 살던 제가 요즘은 세상 살면서 지적보다는 서로가 주고받는 힘 있는 위로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봄을 타는지 여름을 타는지 또 겨울을 타는지 그 느낌은 모르고 삽니다. 언니들은 북한에서 타본적 없기에 사계절을 다 탈 거라고 하기도 해요. 솔직히 잎이 떨어지고 단풍이 든 산을 보면 탈북할 때가 생각이 나고요. 고향에서 으스스한 가을 날씨에 손에 불면서 창고에서 장작을 날라 주방에 쌓아두던 때도 생각이 납니다.

 

이곳에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을 날씨에 손이 튼다고 틈틈이 손 크림을 발라주지만, 우리 고향 여성들은 장갑도 없이 손에 가시를 뽑아가면서 오늘도 장작을 나르고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가을이 더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쪽에 사시는 삼촌의 전화를 받을 때였죠. 이곳에서는 흔하게 말하는 이야기지만 북한에서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멘트를 제가 날렸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삼촌 미안해 그리고 많이 사랑해이렇게 말했죠. 정말 30초 이상 정적이 흘렀고 삼촌이 일 없다 아프지 말고 밥 꿍꿍 먹고 어떡하나 잘 버텨봐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단어 집합인 거죠. 자본주의에서 일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인데, 삼촌이 말한 뜻은 삼촌은 너희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니 미안해하지 말고 우리 조카 힘내서 잘 살아라 하는 말이죠.

 

북한에서 고향을 떠나 대학 생활을 할 때도 불안한 사회에서 뭔 큰일을 당할지 몰라 연애도 하지 마라, 이상한 친구들이랑 묻어 다니지 말아라, 어두워지면 기숙사에 얼른 들어가서 문밖에 나오지 말라 하던 삼촌이니, 타향에 가서 조카가 뭔일을 당할까 걱정이 되셨을 거고 또 하루 삼시세끼 먹는 것이 삶의 의무인 그곳에선 밥을 꿍꿍 먹어라는 이야기가 배곯지 말고 잘 살라는 말을 한 것이죠.

 

하지만 삼촌이 제가 갑자기 사랑해라고 말하니 긴장이 오셨나 봐요. 제가 아차 하는 생각에 다시 삼촌에게 삼촌도 나 사랑하지?’라고 물었죠. 그러니 삼촌이 허허 웃으시면서 말이라고 하나라고 무뚝뚝한 북한 남자의 사투리로 대답해줬죠.

 

자본주의 물이 아니라 따뜻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그날 이후 저는 삼촌이 전화가 오면 늘 사랑해 그리고 잘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거든요. 어느날부터인가 삼촌도 전화를 끊을 때 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고맙다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며칠 전 동생이랑 친구들이랑 불금을 보냈는데요 불타는 금요일의 줄임말이에요. 1차는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북한에서 식당을 경영한 경험이 있어 제가 고기를 잘 굽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제가 늘 고기를 구워요.

 

그런데 그날은 남한에서는 남자·여자가 있는 테이블에서 여자가 고기를 구우면 예의 없는 남자들로 오해를 받는다고 하면서 남자분이 고기를 구워주었죠.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몇 번 본 친구일진데 그런 예의를 지키는 것도 감사했고 관건은 고기를 엄청나게 잘 구워주셨어요.

 

저도 모르게 ~~ 너무 멋지다, 이 나이에 이렇게 고기를 굽는 남자가 섹시해 보이긴 처음이에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분은 흔히 들었던 말인지 모르지만, ‘정말요? 고마워요.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했는데 옆에서 동생이 더 난리인 거죠.

 

왜 갑자기 고기를 굽는 사람을 긴장하게 구냐고, 언니가 이렇게 막 멘트를 날리는 것에 습관이 안 된다고 닭살이라고

 

제가 괜히 동생을 당황하게 했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다 날려본 멘트에 한없이 부끄러웠답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동생에게 별거 아닌데 너무 언니를 몰아세우는 거 아니냐면서 요섹남을 모르냐고 요섹남은 요리 잘하는 멋진 남자의 줄임말이거든요.

 

신나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저녁을 보냈답니다. 서로 기분 좋은 말을 해주고 이쁜말을 해주고 즐거운 시간을 더 즐겁게 하려고 이곳에 사는 탈북 여성들은 고향에서 늘 외치던 수령 결사옹위’ ‘백두의 혁명정신을 잊었고, ‘동무는 앞으로 잘할 수 있습니까? 고칠 수 있습니까?’라며 생활총화 시간에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던 행동과 말을 하지 않고 삽니다.

 

이곳에서는 늘 오늘도 즐거운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만남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도 너무 멋지니까 힘내세요이러고 삽니다.

 

북한에 계신 청취자님들은 지금 귀가 정말 많이 간질거리시죠? 저도 처음에는 아주 많이 간질거렸고 가끔 이 사람들이 거짓으로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화도 내지 않고 의견도 부리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고 착하게 살 수 있지? 라고요. 그런데 이젠 10년이 되니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우리의 삶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요.

 

극찬의 존경어와 흠모의 말은 늘 김부자에게만, 사랑하는 부모님, 존경하는 부모님, 인자하신 부모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써보지 못한 북한에서의 시영이는 자유를 찾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쁜말만 하고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북한에 있는 친구에게 또 청취자님들에게 라디오 목소리가 아닌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너무 멋진 하루였어! 고생했어.’, ‘세상에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고, 사랑해라고 말할 날이 오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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