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김정은의 전용 도주로
2024.10.18
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9월 초에 ‘김일성은 창성을 왜 100번 넘게 갔을까’라는 방송을 통해 김정은이 지금 추진하는 ‘지방 발전 20X10 정책’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앞으로 김정은은 또 10년만 참으라고 여러분들을 속일 테지만, 그 10년이 지나도 북한 세습 독재 체제의 한계로 발전은 있을 수 없고, 그때 가서 또 다른 거짓말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닐세라 북한 매체들은 최근 들어 여러분들에게 ‘10년만 참으라’는 선전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가령 노동신문은 1면에서 김정은의 9월 9일 연설을 두고 “10년 후 현실적 변혁이 일어날 것이며 총비서 동지께서 결심하시면 무조건 된다”고 떠들더군요. 그러면서 “지방공업 공장들에서 서로마다 개발 경쟁, 품질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면 나라의 경제발전은 더욱 비약적으로 가속화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개발 경쟁이나 품질 경쟁이란 말은 북한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경쟁하고 싶습니까?
사회주의 경제의 근본적 한계 중의 하나가 보상이 없다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물건 잘 만들어 팔아도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또 10년을 저런 허황된 말에 목을 매서 살아간다면, 그 시간에 가장 행복할 사람은 김정은입니다. 김씨 일가는 오래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을 속여 왔습니다.
요즘 김정은은 한국의 삐라 살포를 구실로 또 포사격을 준비한다며 떠들던데, 저는 김정은의 포사격 명령을 내리고 어디에 숨어버릴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세가 긴장될 때마다 김씨 일가가 숨었던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창성인데, 제가 창성 이야기를 저번에 일부 했지만 오늘은 좀 더 다른 각도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1950년 6·25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은 미군의 참전으로 후퇴하게 됐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넘으면서 본격적인 북진이 시작됐습니다. 그 10월 1일은 오늘날 한국에서 ‘국군의 날’입니다.
국군의 북진 소식에 김일성은 겁에 질렸습니다. 그는 이틀 뒤인 10월 3일에 두 자녀 김정일과 김경희를 포함한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난시켰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모두 넘어선 날이 11일인데, 이날 저녁 김일성은 라디오로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김일성저작선집’에 이 내용이 다 있습니다.
몇 시간 뒤인 12일 새벽, 그는 스탈린이 선물한 고급 리무진을 타고 비밀리에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에겐 목숨 바쳐 싸우라고 하고선 자신은 평양이 함락되기 일주일 전에 먼저 도망을 친 것입니다. 김일성이 도주하는 와중에도 북한 라디오에선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지역을 사수하라는 연설이 반복적으로 방송됐습니다. 김일성은 도주 중이던 16일에 또 ‘각 군단, 사단들에선 독전대를 즉각 조직해 도주하는 자들을 즉결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인민은 폭격 받아도 좋지만, 자기 가족은 폭격 받으면 안 되고, 자기는 도망쳐도 되지만, 인민은 도망가면 죽이란 말이죠.
북한 제2의 수도는 강계였지만 김일성은 이곳에 주요 정부 기관만 보내곤, 자기는 딴 곳으로 샜습니다. 폭격이 두려워서겠죠. 청천강 다리가 폭격에 파괴돼 막히자 차를 버리고 빨치산 시절 경험을 활용해 산으로 평남 덕천, 평북 동창으로 이동했고 25일 창성에 도착했습니다. 김일성은 이때 창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높은 산들이 막아 중국 영공으로 돌아오지 않고선 폭격도 불가능했고, 중국으로 도망칠 조건도 완벽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수풍호는 겨울엔 차가 다닐 정도로 꽁꽁 얼고, 여름 홍수 때에도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인근엔 중국과 연결된 수풍댐도 있죠.
전후 창성엔 ‘창성초대소’로 불리는 대규모 별장촌이 건설돼 전쟁 위기 때마다 김씨 일가가 가족과 미녀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숨었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빨리 도착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도주로도 만들어야겠죠. 평양-향산 고속도로가 인민을 위해 만들었겠습니까. 그리고 향산-창성 고속도로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1980년대 건설된 향산-창성 1호 도로는 약 150㎞ 길이에 폭이 9미터나 되는데, 김씨 일가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이 도로에 올라서면 경비를 서는 974부대에 즉시 체포돼 처벌됩니다. 도로 양 옆에 높은 이깔나무(잎갈나무)를 심어 정찰기에 차가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창성초대소 바로 옆에 비행장도 번듯하게 건설됐습니다. 평시나 유사시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겁니다.
김일성은 전쟁 위기 때마다 창성에 도망가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빈둥거리는 것이 심심하기도 했는지 1962년 8월에 갑자기 “창성을 전국의 본보기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건 창성에 도망쳐 숨을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창성을 현지 지도한 횟수가 각각 108회, 60회라고 밝혔는데 창성에서 놀다가 주변 돌아본 것이죠. 김정은 시대엔 전국의 본보기가 삼지연으로 바뀌었는데, 그가 스키 타려 백두산에 더 많이 놀러 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사례만 봐도 여러분들은 김씨 일가의 위선을 알 수 있습니다.
62년 전 김일성은 창성에서 “지방 특성에 맞는 공장들을 대거 건설해 인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비단옷을 입히겠다”고 좀 더 구체적인 공언을 했는데, 9월 9일 연설에서 김정은이 말한 ‘획기적으로’의 의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발전 없이 퇴보만 하다 보니 속이는 방법까지 퇴보하는 듯합니다. 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