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70년전 북에 두고 온 약혼자가 보고 싶소”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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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기자가 본 인권] “70년전 북에 두고 온 약혼자가 보고 싶소” 김상용 할아버지가 버지니아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상용 제공

 “I miss my fiancé who separated 70 years ago”


 (내레이션): 지금으로부터 72년 전 1950625일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한국 전쟁. 전쟁은 한민족을 동족상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가족과 친척들을 뿔뿔이 갈라 놓았습니다.

그 동란 속에 헤어진 약혼자를 아직도 그리는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사는 김상용 할아버지. 올해로 90을 맞는 그는 다시 꼭 만나자는 말 한마디 없이 허둥지둥 떠나야 했던 이별의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RFA자유아시아방송은 한국전쟁 72주년이 되는 올해 재미이산가족 김상용 할아버지가 북한에 두고 온  약혼자를 그리는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배경음악>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상용 할아버지.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상용 할아버지.
김상용: (내 약혼녀는) 박봉인이요. 박봉인인데 만나고 싶지요. 지금도 다른 여자는 잘 안보여요. 내 그 여자만 보이지


 (내레이션): 지금도 어디선가 꼭 살아 이 방송을 듣는 것만 같아 김상용 할아버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약혼자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첫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봄날의 아지랑이 마냥 설레임과 낭만으로 기억됩니다. 해방 후 강원도 안변군 신고산 인민학교(국민학교) 선생으로 배치 받은 김상용 할아버지는 당시 이성이 무엇인지 몰랐던 청년이었습니다. 여선생들 속에서 인기가 많았던 김씨는 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이 가는 한 여선생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김상용: 1948년 그때 나는 16살인데, 사범학교를 나와서 신고산 인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갔는데, 나는 사범학교를 나왔지만 그 선생은 유치원 원장이었어. 그 여자는 나보다 두살 위였는데 1930년 생이고 난 1932년 생이요. (그 여자는)12 25일이 생일이고, 나는 1932 9 25일이 생일인데, 그 여자는 키가 제일 커요. 나와 비슷한데 여자 키 치고는 크지요. 우리 학교에 선생이 모두 28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여자 선생은 12명 있었어. 그런데 다른 여선생들은 다 치마 저고리를 입었는데 그 여선생만은 스카프에 투피스를 입었어요. 하여튼 우리 엄마만큼 멋쟁이였소. 우리 엄마도 치마 저고리를 안 입었는데.

 

(내레이션): 그러던 어느 날, 김상용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으로 그 여선생을 초청했는데 알고 보니 유치원에 다닐 때 제일 가까운 소꿉 친구일줄이야.    

 

김상용: 나도 고향이 청진이고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가자고 해서 우리 집에 그 여선생을 데리고 가서 사진첩을 보여주었지. 앨범을 열어 가지고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 선생이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 “아, 이거 내 것과 똑 같은 사진이다”라고 해요. 그러면서 “아, 이 애 때문에 내 얼굴이 안 나왔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애 때문이라고 하는 게 바로 나요. 사진 속에 내가 (그 여자를)끌어 안았는데, 이 여자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머리칼이 이렇게 흘러나와서 얼굴을 가리웠지. 그래서 내가 “이게 바로 나요”라고 하니까, 그 여선생은 “아,”라면서 놀라고, 나도 놀라서 “엄마, 엄마, 내가 안은 애가 이 선생이래요.”라고 하니까, 어머니는 당장 그녀의이름을 부르는 거야. “야, 너 봉인이지”라고 부르니까, “네, 어마나?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야, 네 엄마 어디 있어?”라고 묻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서 뛰는 거요. 우리를 내버려두고 그렇게 달려가서 만나서는 서로 붙잡고 울고 있어. 너무 너무 반가워서. 그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나와 그 선생으로 인해서 엄마가 친구를 만난 거요.

 

(내레이션): 운명적인 만날일까, 유치원 다닐 때 누구에게서 해코지 당할 세라 애지중지 보호해주던 그 소꿉친구를 결국 다시 만났다는 김 할아버지.

 

김상용: 7~8살 때 유치원 같이 다니고, 제일 가까운 애가 그였었는데, 어릴 때도 그를 제일 좋아했어. 그렇지만 이성적인 게 아니라 그냥 괜히 보위하는 거요. 제일 예쁘니까 남자애들이 고무줄을 끊어버리고 그랬는데, 그런 애들을 데려다 혼내주고 그랬지. 그런 여자가 우리 집에 왔다가 만나게 된 거지.

 

(내레이션): 그렇게 되어 두 사람은 약혼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둘은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상용: 1948 1 30일 일요일이요. 선생들을 불러 가지고 약혼식도 하고 그때부터 같이 사는 거요. 둘이서 그냥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어. 6.25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요.

 

(내레이션): 1950 6 25일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전쟁은 할아버지의 가족과 약혼녀를 뿔뿔이 갈라 놓았습니다. 1950 9월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면서 강원도 안변군도 남한의 치하에 놓이게 되자 김상용 할아버지는 대한청년단 청년 부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해 11월 중공군과 인민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과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고 김상용 할아버지도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김상용: 약혼녀는 원산에 있는 집에 가 있었으까, 나는 어머니에게 “엄마, 나 가서 봉인이 데리고 올 테니까 좀 기다리세요”하고 원산으로 갔어요. 원산에 갔더니 그 집 대문에 못을 이만한 걸(한뽐이나 되는) 박아놓고 없어졌는데요. 2층에 있던 아주머니가 “아이고, 그 선생 지금 없어요.”라고 해서 “어디 갔어요?”라고 물었더니 “피난 갔어요.”라고 했어. 그래서 앞으로 만나겠지 하고 “아주머니 제가 왔다 갔다고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요. 이별이라는 소리도 없이 그게 바로 생이별이지.

 

(내레이션): 대한청년단 부장으로서, 유엔군과 국군에 협조했던 김상용 할아버지가 인민군과 중공군에 잡히면 무사치 못할 게 뻔했습니다.  

 

김상용: 국군이 북진하다가 배타고 다 철수해버렸어요. 그들이 대한민국으로 다 후퇴하자 산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이 다 나오는 데 어떻게 돼요. 나는 국군을 믿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했는데 대한청년단 청년 부장으로 있었는데 거기 있을 수 없지.

 

(내레이션): 피난길에 오르던 김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도무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부랴부랴 떠났습니다.

 

김상용: 내가 신고산에 다시 가서 어머니를 데리고 피난 가려고 하니까, “너희들이나 빨리 피해라”라고 해서 어머니에게 “그럼 3일만 숨었다가 올게요. 기다려주세요”라고 떠났지.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두고 내가 대한민국까지 올 줄 몰랐어. 내가 애국청년들을 데리고 동해안으로 해서 큰 길에 나오니까, 피난 간다고 나선 사람들로 인산 인해요. 다 북한을 버리는 사람들, 고향을 버리는 사람들인데 오라고 해서 온 게 아니지. 그때가 1950 11 30일 경이었는데, 피난민이 약 1 6천명 정도 되는데, 내가 데리고 온 무장한 80명을 피난민들 중간 중간에 배속시키고, 난 대장으로서 제일 맨 앞에 섰지.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훈련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내 말을 잘 들었어. 내가 “뒤로 전달. 지금 앞에 다리가 있으니까 빨리 밀지 말라라고 하면 내 말을 잘 들었어. 그때 내 동생이 14살이었는데 내 부관으로 두고 나는 대장이 되어 따발총을 가지고 1 6천명 달하는 피난민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출발해서11 29일 대한민국 강원도 묵호라는 곳에 도착하니까, 그때가 바로1951 1 1일이었어.

 

(내레이션): 김상용 할아버지는 전쟁 와중에도 약혼자를 애타게 찾았으나, 두 사람은 점점 기약 없는 이별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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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후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상용 할아버지. /김상용 제공

김상용: 대한민국에 와서도 육군 이등병이 되어 휴가를 얻어 가지고 자꾸 애타게 찾아다녔는데, 이남에 여자 친척들이 있어 찾아보았는데 소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휴전이 되어버렸지.

 

(내레이션):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에도 손꼽아 기다리던 통일은 오지 않고,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약혼녀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김상용 할아버지.    

 

김상용: 내가 찾아 갈 수 도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포기하는 거요. 가봐야 없을 거라고요. 어머니는 이젠 100살도 넘었을 것이고, 여동생 살아 있을 텐데. 이름은 김상해요. 지금 살아 있으면1945년에 태어났으니까 70~80세는 되었겠지. 내 동생은 내가 죽기 전에는 살고 있을 테니까 봐도 모르겠지만 보고 싶고, 어머니 산소가 있으면 산소에 가고 싶고, 약혼자가 보고 싶소.

 

(내레이션): 김상용 할아버지는 지금도 약혼자를 그리며 피아노를 칩니다.

 

김상용: 1950 1 30일 같은 학교에 있을 때 내가 그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 50여명 남녀를 모집했어. 그리고 약혼자를 옆에 세워놓고 그 여가 노래를 부르면 나는 피아노를 쳤지.

 

<피아노 음악> “즐거운 나의 고향”

 

72년 전 그때처럼 자신은 피아노를 치고 약혼자는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 모습을 지금도 눈에 선하다는 김 할아버지. 과연 만남의 꿈은 언제 이뤄질까.

 

지금까지 강원도 안변군이 고향인 김상용 할아버지가 72년 전 6.25 전쟁 때 헤어진 약혼자를 그리는 사연 전해드렸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기사 작성 정영,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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