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탈북여성이 고향을 떠난 이유(1)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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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탈북여성이 고향을 떠난 이유(1)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한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수남시장으로 가고 있다.
/RFA Photo

<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전세계 국제적 명절인 ‘3.8부녀절’(International Women's Day)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여성을 위한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미국에서 시작된 ‘전국 여성의 날’은 점차 전세계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이벤트로 발전하다가, 1975년에 유엔이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하면서 비로서 국제적인 기념일로 자리잡았습니다.

북한도 남녀평등권 법령을 제정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도를 높이고, 산전산후 혜택을 제공하는 등 복지제도를 확대한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 북한 여성들의 삶은 열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례가 바로 남한으로 입국한 탈북자들 가운데 여성은 70퍼센트 넘었습니다. 왜 이처럼 많은 북한 여성들이 고향 땅을 등지고, 남한으로 향했는지, 미국 동부에 정착해 사는 탈북여성 김 리사씨로부터 북한에서의 삶에 대해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황해북도가 고향인 김 리사씨는 1997년 북한을 떠나 남한에 정착했다가 4년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습니다.

질문: 북한에 있을 때 3.8부녀절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김 리사: 3.8부녀절은 제가 어릴 때부터 엄마들이 “3.8부녀절은 여자 명절”이라고 해서 그때부터 알게 되었지요. 우리가 살던 군인 사택은 좀 강했어요. 3.8부녀절에 엄마들이 예쁘게 화장하고, 자기네끼리 머리도 감는 것, 세트도 하고, 저고리를 입고, 군대들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랬어요. 맛있는 것을 해놓고요.

질문: 3.8부녀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노래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김 리사: “싸리나무 한 그루는 꺾기 쉽지만/ 아름드리 나무는 꺾지 못하리/ 여성들도 모두다 힘을 합치면/ 그 어떤 원수도 이겨낸 다오” 그거 혁명가요이지 않아요? 참 노래가 좋았는데, 그때는 그것이 왜 그렇게 당에 충성해야 한다는 소리로 들렸지요? 희한하네요.

노래에 있듯이 뭉쳐서 자유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 노래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좋은 노래였는데, 왜 그때는 그게 하나도 안보였고, 뭉치기는 어떻게 뭉칩니까, 북한에서, 그래서 나 혼자 떠나게 된 거지요.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뭉치면 이긴다”는 그 의미는 조직생활을 잘하라는 소리로 들렸고, 싸운다는 것은 항상 북한이 미국이나 남조선 괴뢰들에 대해서 싸우라고 했으니까, 그쪽으로만 생각했지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 같아요.

북한 해군 동해함대 사령부 소속 무전수로 복무했던 리사씨는 군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추억은 생리대가 부족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김리사: (주인이 없습니다)누구 생리대인지 모릅니다. 누가 생리대를 씻어서 척 걸어 놓으면 어떤 다른 여자가 가져가면 그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네 것, 내 것도 없어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 조차 없어 가지고, 남이 빨아 놓은 내의를 훔쳐다 생리대로 사용하는 애들도 많았어요. 특히 상등병과 전사 생활 때는 거의 생리를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갱도 안에서 8시간 앉아서 근무 서다가 갱도 밖으로 나오면 다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고 아픕니다. 그래서 애들이 갱도 들어가는 것이 제일 싫어 했어요.

김 리사씨는 4년간 군대 복무를 하고 후보당에 입당하고 대학 추천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간부로 승진할 수 있는 정기 코스를 밟던 리사 씨는 대학에서 사랑을 했다는 죄 아닌 죄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 리사: 저는 3년반인가 군대 복무를 하고 후보당에 입당하고, 바로 대학 추천 받아갔어요. 그 다음에 대학생활을 하는 과정에 그들(세포비서)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사상이 삐뚤어지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제가 연애를 했는데, 못하게 하는 겁니다. 당비서가 “네가 후보당원인데, 앞으로 정당원이 되려면 풍기문란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추잡한 짓을 했다고 비판을 하는 거예요. 제가 풍기문란으로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성관계를 했냐?”고 당비서가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거기서 완전히 뒤집어 진 겁니다. 내가 남자를 만나든 안 만나든 내 자유인데, 네가 왜 간섭하냐고, 나도 그 남자와 갈등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데 당비서까지 나를 ‘풍기문란’으로 비판해서 완전히 달라졌어요. “나를 뭘로 봐?” 그래서 나는 “엄마, 나 학교 안갈래”하고 퇴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노동당에 입당까지 했던 리사씨가 탈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만 열차에서 자살한 한 여성을 목격한 이후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 리사: 장사하다가 자살하는 여자를 보았습니다.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은 비료와 소금과 바꾸어 (물물교환으로)살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비료나 소금이나 다 돌덩이 같이 무겁지 않아요?

어느 날, 한 여자가 그걸 지고, 북쪽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는데, 글쎄 열차 안전원(경찰)이 왜 그 여자만 끌어내리려고 해요? 열차가 가는 것을 세우고, 또 끌어내리려고 하자, 그 여자가 전기 고압선에 머리를 받아서 자살하더라구요. 그걸 직접 제가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다음에 “엄마, 나 중국에 갈래요” 라고 하고 떠나게 된 거지요.

김 리사씨는 북한에서 여성들이 자유나 권리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자유나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김리사: 제가 24살에 제대 되고, 1997년 12월에 두만강을 넘었어요. 우리 반 애들이, 얼마나 꽃다운 애들입니까, 제가 군대에서 딱 제대 되어 오니까, 임신해서 배 나온 애도 있고, 결혼한다는 애들도 있고, 굶어 죽은 애도 있고, 천태만상이더군요. 우리반 애들 보니까,

그렇게 학교 때 잘 나가던 애들도 시집만 가면 그냥 남편에게 두드려 맞고, 그냥 장마당에 앉아서 애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장마당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도대체 결혼을 못 하겠는겁니다. 그래서 빨리 머리가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처럼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국가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하게 되었고, 결국은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다시 남한으로, 남한에서 또다시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현재 남편과 10살짜리 아이와 함께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고 살아가는 김 리사씨는 미국에서의 포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김 리사: 사실은 여자의 말을 제일 많이 듣는 대한민국이 살기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저는 순리를 따라서 정확히 가고 있는 미국이 더 좋습니다. 여자들이 살기에는 미국이 좋습니다. 미국은 훨씬 가정적입니다. 왜 그렇게 미국 남자들은 일을 잘해요?(웃음)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더 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물류 수요가 급증한 추세에 맞게, 김 리사씨는 남편과 함께 대형 트럭을 운전하며 돈도 벌고 미국 방방곡곡을 다니는 것이 당면한 계획이라며, 대형운전면허 시험에 열중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김 리사: 저는 미국을 좀 보고 싶습니다. 남들은 돈을 쓰면서 세상 구경을 한다고 하는데, 저는 돈을 벌며 세상 구경을 하려고 합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에는 미국 동부에 정착한 탈북여성 김리사씨로부터 3.8부녀절의 추억과 향후 미국에서의 정착 계획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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