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중국] ‘작은거인’ 덩샤오핑과 김일성 동상
2024.08.29
- 한×중수교 24주년, 북×중수교 75주년 가까워지는 한×중, 멀어지는 북×중?
- 중국, 북한과 접경 지역 17곳에 무선국 설치 계획… 북한 국제단체에 문제 제기
- 덩샤오핑 탄생 120주년 중 전역 칭송 분위기
- 덩샤오핑과 김일성 그리고 김정일과의 비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중국> 진행에 김명성입니다.
지난 24일은 한×중 수교 24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한동안 멀어졌던 한중 관계는 회복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반면 올해 10월, 수교 75주년을 맞는 북한과 중국의 ‘이상기류’가 국제기구에도 노출됐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소식으로 전합니다.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한중 수교 32주년과 관련해 “정부는 수교 32주년을 맞는 양국 관계가 상호 존중, 호혜, 공동 이익을 바탕으로 보다 건강하고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중 측과 함께 계속 노력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2017년 사드 사태 이후 소원했던 한중 관계는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윤 대통령과 리창 중국 총리는 양국 간 소통의 지속성에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입니다.
INS - 중국은 한중 관계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이 지속되길 바랍니다.
이후 한중 대화채널이 속속 재개됐는데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5월 베이징을 방문했고, 한중 외교안보(2+2) 대화(6월), 제10차 한중 외교 차관 전략대화(7월), 한중 외교 장관 회담(7월) 등 고위급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한중 지방정부 간 교류도 활발해졌는데요, 지난 4월 하오펑 랴오닝성 당서기가 코로나19 이후 중국 지방정부 당서기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했습니다. 6월에는 신창싱 장쑤성 당서기, 스모우쥔 간쑤성 부서기가 잇달아 한국을 찾았습니다. 2008년 시작됐으나 코로나 여파로 2020년 중단된 한중 청년 교류도 5년 만에 재개돼 50명의 한국 청년이 지난 19일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렇게 수교 32주년을 맞아 뚜렷해진 한중 관계 회복 신호는 올해 10월 수교 75주년을 앞둔 북한에 대한 우회적 불만 표시로 읽히기도 합니다. 최근 중국은 단둥시를 포함한 북중 접경 지역 17곳에 라디오 방송용 무선국 설치 계획을 세웠는데 북한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중국 당국의 무선국은 전국에 FM 라디오 방송 등을 목적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전국에 설치될 총 191개 무선국 중 중국 접경 지역에 계획된 시설이 17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지난 7월, 주파수 간섭이 우려되고 사전 조율도 없었다며 국제전기통신연합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유엔 산하 전문 기구에서 북중 양측의 마찰이 노출된 건 매우 드문 일입니다. 또 시기적으로 중국 위성을 통해 TV 송출을 해오던 북한이 갑자기 러시아 위성으로 갈아탄 시점과 맞물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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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 무선국 설치하려는 중, 막으려는 북 ‘정보전쟁’
특히 지난달 27일 북한의 정전 71주년 기념식엔 평양 주재 중국 대사만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북한과 관계에 이상 기류는 없다면서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압록강 홍수 때는 단둥에서 설치한 방벽 탓에 신의주 침수 피해가 컸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중국 대사가 수해 지역을 찾아가 구호 지원 의향을 밝혔지만, 북한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북러 밀착 속에 올해 상반기 중국의 대북 쌀 수출은 지난해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오는 9월 9일 정권수립기념일을 맞아 각국 재외공관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기념행사를 갑자기 취소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북한이 태풍 마이삭의 영향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지역에 홍수 피해를 입었던 2020년, 수해 복구를 위해 정권수립기념일을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 경우는 있지만 재외공관에서 준비하던 기념행사까지 취소한 건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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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생각의 폭이나 깊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거침없이 해낸 사람을 ‘작은 거인’이라 부릅니다. 지난 8월 22일은 지금 중국 경제의 초석을 다진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중국 주요 매체들은 일제히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를 내보내며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오늘의 두번째 소식으로 전합니다.
1904년 쓰촨성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키가 아주 작았는데, 젊었을 때는 157cm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키가 줄어 152cm로 줄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이렇게 키는 작지만 추진력 있게 개혁, 개방 정책을 밀어붙여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의지를 상징하는 단어로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 기간 중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면서 중국 혁명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대장정과 항일전쟁,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과정에 군사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지도자급 인사로 성장했습니다.
동란의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숙청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정치 무대에 복귀해 실권을 장악했는데요. 마오쩌둥의 폐쇄적인 정책을 극복하고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추진했습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중국 특유의 실용적인 경제 모델을 구축한 그는 홍콩과 인접한 광둥성 선전에 특수경제구를 지정해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중국의 자본주의식 경제 발전을 견인했습니다. 또한 비효율적인 국유기업을 개혁하고 민간 기업을 육성했으며 집단농장체제를 폐지하고 개인농을 도입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직접 미국, 일본 등을 방문하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서유럽 5개국에 인재를 파견해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등 개혁·개방 노선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는 1997년 2월 19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요,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중국 지도부의 나이를 67세로 제한한 칠상팔하(七上八下) 정책으로 꼽힙니다. 67세까지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수 있지만 68세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칠상팔하 정책의 내용인데요, 이 정책은 종신 독재를 막고 중국식 집단지도체제를 연착륙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낙후했던 중국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려 세운 이 작은 거인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지난주 중국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한반도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요, 북한과 친선 우호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북한의 우상숭배와 세습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한반도 현대사 전문가,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교 교수의 저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에는 김일성과 덩샤오핑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원래 평양의 김일성 동상은 1972년에 김일성의 환갑을 맞아 세워졌으며, 금박이 입혀져 황금빛 광채를 띠었다고 합니다. 1978년 9월,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이 동상을 보고 “당신들은 왜 돈 없다고 허구한 날 우리에게 원조해 달라는데, 저런데 쓸 금은 있냐?”며 질책했고 이후 북한이 김일성 동상에서 금박지를 벗겨내고 동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덩샤오핑이 다시 198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동상이 너무 많은 걸 보고 ‘이렇게 동(銅)이 넘칠 정도면 우리 지원이 필요 없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그는 북한의 대남 군사 도발 야욕을 멈추고 남북 간 대화를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미 우드로윌슨센터 북한국제문서연구사업단(NKIDP)이 2012년 발굴한 옛 공산권 국가의 비밀 외교 전문에 따르면 1979년 4월 김일성 주석은 인도차이나 공산혁명에 고무돼 중국의 지원을 얻어 남한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하고자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당시, 덩샤오핑 부주석은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김 주석의 도발 의지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면서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으로 조성된 대화 분위기를 이어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또 1983년 6월, 세습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 이전, 후계자의 위치로 김정일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을 수정주의로 비난했고 이에 덩샤오핑이 격노했고 결국 아버지 김일성에게 야단을 맞은 김정일은 같은 해 9월, 중국에 가서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8월 한·중 수교 당시, 북한은 덩샤오핑을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맹비난했습니다.
덩샤오핑은 김정일이 1983년 10월, 버마(미얀마) 아웅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 각료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한 후 김정일을 만나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은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1997년 사망하기 전까지 김일성만 세 차례 만났습니다.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사망한 후인 2000년 5월에야 베이징을 방문해 장쩌민 국가주석을 만났습니다.
키가 작았던 덩샤오핑은 인위적으로 키를 크게 보이려는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개혁과 개방을 추진한 추진력으로 ‘작은 거인’이란 수식어를 얻었습니다. 김정일도 키가 작았죠. 그는 작은 키를 숨기려 키 높이 구두를 신었고, 키가 170cm가 채 안 되는 김정은 총비서 역시 키 높이 구두를 신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개혁개방을 거부해 북한의 경제를 망치고 수백만의 주민을 굶겨 죽인 김씨 일가는 아무리 키 높이 구두를 신는다고 해도 큰 사람, 즉 ‘거인’이란 말은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대신 그들에게 붙는 수식어는 지금 제가 방송에서 말할 수 없지만 여러분도 잘 아는, 바로 그 말입니다.
오늘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오늘의 중국> 진행에 김명성이었습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오디오 소스: AP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