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벽을 넘은 인터뷰 (1)
2024.09.03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 수가 약 3만 4천여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중 10년 이상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탈북민 비율은 72%에 달하는데요. 예술가, 사업가, 전문가, 직장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한 탈북민들은 무엇이 달랐을까요?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1년에 2번,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의 경험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탈북민들이 분단의 벽을 넘어왔기에 행사 제목은 ‘벽을 넘은 인터뷰’인데요. 그 현장, <여기는 서울>에서 담아봤습니다.
(현장음-안향아) 남과 북의 동갑내기가 전혀 모르던 동네에서 전혀 모르던 사람으로 살다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오르게 됐습니다. 정말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저희 둘 동갑내기 친구가 만날 오늘의 주인공을 이 자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원순복 대표님 나와주세요. 박수를 크게 환영해 주세요.
2024년 제1회 ‘벽을 넘은 인터뷰’의 주인공은 고급 수제 디저트 전문점 ‘원쌤미식’의 대표, 탈북민 원순복 씨입니다. 주인공보다 먼저 무대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청년은 남한 출신 안향아 씨와 탈북민 박서연 씨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진행자이자 함께 이야기를 나눌 패널입니다.
먼저 향아 씨의 소개로 오늘의 주인공, 순복 씨가 등장하는데요. 굽 높은 구두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나옵니다.
(현장음-원순복) 안녕하세요. 원순복입니다. 제가 웬만해서는 가게를 안 비우고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오늘 저를 주인공으로 모셔 준다니까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는 떡 제조 경영학 박사를 전공한 한식 디저트 전문가이며 현재 세종시에서 ‘원쌤미식’이라는 한식 디저트 전문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박수)
순복 씨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2008년, 한국에 정착했다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박서연 씨가 고향 얘기에 반색합니다.
(현장음-박서연) 원 대표님, 저는 함경북도랑 가까운 양강도 삼지연에서 왔어요. 삼지연은 백두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치가 정말 좋은 곳인데 원 선생님의 고향 회령은 어떤 곳인가요? / (원순복) 회령 씨를 표현하면 백살구! 백살구는 딱 회령의 특정 지역에서만 나고요. 아마 북한 분들도 못 먹은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리고 백살구는 하얀 살구가 아니라 일반 살구보다 두세 배는 크기가 큰 살구인데 일반 주민들은 잘 못 먹고 중앙에 다 올라갈 겁니다. 새콤하고 달콤하고 오묘하고… 그런 맛은 아마 전 세계에서 회령시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내 고향은 ‘백살구의 고장’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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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회령 얘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장마당으로 이어집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장마당으로 나섰던 북한의 수많은 어머니들 또 젊은 여성들. 원 대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원 대표에게 장마당은 어렵고 힘든 곳이 아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그런 소중한 장소입니다.
(현장음-원순복) 어릴 때는 장마당을 휩쓸었죠. 저는 그때 20대 초반이었는데 머리가 좀 빨리 돌아갔다 할까요. 앞을 내다봤다 할까요. 고춧가루 장사도 하고 두부도 팔고 술도 팔았어요. 돈도 잘 벌었죠. 진짜 장사가 잘되니까 겁이 없이 나갔죠. 아마 그때 그 기초가 지금 저를 만들어주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북에 있는 분들은 알 거예요. 다른 잡화 장사나 음식 장사는 많지만 고춧가루 장사는 딱 특정 지역에 그 모임이 따로 있어요. 그리고 고춧가루를 그냥 팔면 가격이 너무 세니까 단가를 낮추려면 거기에 어떻게 해야 되나요? 벽돌 가루를 섞는다는 말들도 있는데요. 사실 옥수수 가루에 중국에서 들어오는 색소로 고춧가루 색깔을 내서, 그걸 섞어 단가를 조절해요. 그렇게 해서 벌다가 저도 당했고 결국 망한 거죠.
순복 씨는 옥수수 가루에 색소로 가짜 고춧가루를 섞어 판매했습니다. 처음에는 수익이 많이 났지만 점점 가짜 고춧가루를 늘렸고, 결국엔 망했습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한 번은 아니었지만, 순복 씨는 장마당이 좋았답니다. 한 바퀴 둘러보면 살아있는 기분이 들고 다음 사업의 아이디어도 얻게 되고, 순복 씨에게 장마당은 백화점보다 더 값진 물건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순복 씨가 그런 장마당을 뒤로 하고 회령을 떠난 이유가 있는데요, 장마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큰 세상을 마주했기 때문이랍니다.
(현장음-원순복) 당시 북한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보름 이상 (북한) 사람들을 중국에 보내줬어요. 대신 들어올 때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 중 60~70 퍼센트를 바쳐야 했죠. 저희 아버지가 화교였는데요, 제가 장사로 본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직접 중국에 나가기로 했는데, 군 경비원들도 친해서 쉽게 넘어갔고 삼촌 집으로 가서 머물렀는데… 하루하루 보니까 너무 풍요로운 삶인 겁니다. 장마당에 비할 게 아니더라고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속담이 참 저한테 와닿았어요. 그래서 (북한에) 갈 게 아니다, 눌러앉은 거죠
합법적이지 않은 체류 신분과 강제 북송의 위협 또 중국 가족의 학대 속에서 많은 탈북민이 중국 생활을 고통으로 기억하지만 순복 씨는 운이 좋았습니다. 10년을 중국에서 살았는데 맥주도 즐겨 마시고 장사를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는데요. 이런 순복 씨의 이야기에 서연 씨가 잠시 내려놨던 마이크를 잡아 듭니다.
(현장음-박서연) 저는 전혀 공감이 안 돼요. 저는 ‘오늘 내가 과연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넘어왔는데 원 대표님 얘기를 들으니까 조금 화가 날까 말까 하네요. 이렇게 쉽게 온 사람도 있는데 저는 너무 힘들게 왔거든요. 진짜 죽을 뻔도 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오다 보니까 원 대표님 얘기가 조금 얄밉긴 합니다. (웃음)
순복 씨는 10년 간의 중국 생활을 하면서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을 만나게 됐고 한국 소식도 많이 접하면서 마침내 한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는데요, 한국까지의 여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음-원순복) 중국에서 떠나기는 여름에 떠났는데 제가 2008년 1월 1일에 왔어요. 계절이 다르죠. 여름에 떠난 옷하고 겨울에 옷이 어떻겠어요. 너무 추웠고… 그래서 미래를 생각했어요. 제2의 인생을 내가 어떻게 설계할까? 한국에서 살아가야 할 꿈, 내가 한국에서 공부하겠다는 꿈, 내가 여기서 어떻게 정착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순복 씨였지만 그동안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던 터라 한국 생활은 생각보다 힘겨웠습니다. 혼자 힘으로 당장 먹고살아야 했기에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꿈과 열정이 있었기에 그 모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답니다.
한국에 정착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순복 씨는 좀 더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했고 낮에는 일하면서 밤에는 사회복지학 공부를 했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는데요. 이때 자격증도 함께 땄습니다. 상담사 자격증, 보육교사 자격증, 떡 제조 기능사 자격증까지 딸 수 있는 자격증은 모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순복 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됐다는데요. 그게 바로 ‘요리’. 특히 떡을 비롯한 식사 대용의 간식 그리고 식사 후에 먹는 달콤한 한 입, 바로 디저트 분야였습니다.
-Closing Music-
사회복지학 공부도 마치고 대학원에서 떡 제조 경영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기까지 10년. 순복 씨는 직장을 나온 뒤 ‘원쌤미식’ 이라는 디저트 전문점을 창업했고 올해로 3년 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장음-원순복) 북한에는 디저트 문화가 없어요. 한국에서는 커피 먹고 디저트로 입가심하고, 달콤함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만 북한에서는 디저트가 식량이 될 수도 있고 하루 한 끼 밥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여기처럼 다양하지는 않아요. 크기만 크고 양만 많으면 되거든요.
디저트 문화가 없는 북한에서 온 디저트 전문가 원순복 씨!
자신이 원하는 꿈을 찾고 그 꿈을 향해 도전하는 과정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의 시간. ‘벽을 넘은 인터뷰’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