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통하나 봄 (3)
2024.07.16
-Opening Music-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지난 7월 14일은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이었습니다. 지난 1997년, 남한에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첫 시행된 날에 맞춰 이날이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정해진 것인데요. 남한 전역에서 탈북민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됐습니다.
사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3만 4천 명이 되는 탈북민이 참여하는 행사는 매달, 매주, 매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지난 6월 21일부터 22일 이틀 동안 2024 통일문화행사, ‘통하나봄’이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다양한 볼거리, 체험거리가 준비됐지만 시민들의 발길을 붙들어 놓은 것은 탈북 청년들의 토크 콘서트였는데요, <여기는 서울>에서 그 현장, 전해드립니다.
(현장음-드라마 삽입 노래) ‘사랑아 왜 도망가 수줍은 아이처럼~’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은 탈북민 강규리 씨인데요. 지난해 10월, 목선을 타고 한국에 입국한 20대 청년입니다. 규리 씨는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즐겨봤다고 하는데, 드라마에 삽입된 노래도 좋아했다고 하니 사회자가 한 소절 부탁한 겁니다.
규리 씨는 최근 북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특히 코로나 시기 국경 봉쇄로 중국산 소비재 공급이 끊긴 데다가 북한 당국에서 장마당을 통한 곡물 판매까지 중단시켜 살인적인 고물가를 겪었다고 전했습니다.
(현장음-강규리) 코로나 3년 기간에 물품이 하나도 못 들어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모든 물가가 10배씩 올랐어요. 그래서 너무 살기 어려워지고 돈 없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아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지고 한숨 소리뿐이고 그래서 우리 북한 주민들은 늘 불만이 쌓여서 살아가요.
무대 위에 또 한 명의 탈북민이 오릅니다. 2020년 3월, 함경도에서 탈북한 후 남한에 정착한 28살 최윤서 씨입니다. 윤서 씨는 지금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는데 북한 주민 인권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답니다.
윤서 씨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직접 들어보시죠.
(현장음-최윤서) 제가 살 때도 ‘살기 정말 너무 힘들다. 지옥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규리 씨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래도 그때가 살긴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있을 때는 시장에서 양곡을 판매할 수 있었거든요. 다만 대량 판매는 못 하니까 5kg, 10kg 정도만 파는 척하고 대량 구매가 필요할 때는 그분을 따라 식량을 숨겨둔 곳에 가서 몰래 밀매했었어요. 사실 북한에서는 장사뿐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시장 활동이 다 편법이거나 불법이기 때문에 그런 밀매 활동을 통해 주민들은 경제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걸 아예 막아버렸다고 하니까 정말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감도 안 옵니다.
윤서 씨와 규리 씨의 탈북 기간이 불과 4년 차이입니다. 하지만 북한 내부의 사정은 그보다 분명 긴 세월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특히 윤서 씨가 느끼는 위기감은 절실합니다.
(현장음-최윤서) 환율로 얘기하는 게 가장 정확한 비유일 것 같아요. 한국 돈 1만 원이면 제가 있을 당시 북한 돈으로는 8만 원 정도였어요. 그랬던 환율이 한 3배, 4배까지 올랐다는 얘기를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10배라고 하면 한국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어때요, 여러분? 물가가 올랐으면 환율도 올랐겠지 싶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불법적인 환율이다 보니까 환율이 오른다고 해서 물건 가격이 같이 올라서 장사가 활성화되는 게 아니라 환율은 환율대로 오르고 물건은 물건대로 없고 정부는 정부대로 통제하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된 거예요. 정말 거의 주민들을 모두 굶겨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싶은, 거의 미친 상황인 것 같아요.
윤서 씨는 북한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답니다. 이때 아사자를 여러 번 목격했다며 본인이 살던 그 시기의 어려움도 전합니다.
(현장음-최윤서) 꽃제비라고 하죠. 집을 잃고 오갈 데 없는 방랑아들이 굉장히 많은 상황이었고 저는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아사자들도 실제로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21세기에 아사자가 웬 말이냐 하실 텐데요, 지금도 북한에는 아사자가 존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가끔은 가정 생계고를 이기지 못해서 가족 동반자살도 발생해요. 더욱 마음 아픈 사실은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정부가 생계고를 못 이겨서 가족 동반자살을 하는 그들에게 ‘역적’이라는 신분을 부여합니다. 북한에서 자살은 반역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자녀들과 친인척들은 반역자의 가족이 되는 것이고 그들은 또 사회적인 차별과 피해를 당하는데요,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정말 열악한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 속, 윤서 씨와 규리 씨는 유일하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 있었다는데요, 바로 한국 드라마였습니다. 힘든 일을 잊고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드라마가 두 사람의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이마저도 이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됐습니다.
(현장음-최윤서) 어린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나 한국 드라마 이런 거 봤는데 되게 신기해’하는 순간 어른들이 모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는 아빠나 할머니, 이런 분들이 굉장히 통제를 많이 해서 10살 때부터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봤어요. 호기심이 있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때부터는 어른들이 ‘밖에 나가서 얘기하면 안 돼’ 이 정도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드라마를 보고 또 노래도 듣고 그렇게 외부 문화를 접하게 됐고요. 저는 태양의 후예! 송중기 씨랑 송혜교 씨 나오는 그 드라마를 이제 제일 인상 깊게 봤던 것 같습니다. / (현장음-강규리) 저희는 어릴 때부터 USB에 담아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화를 많이 따라 하고 그랬어요…
한국 문화가 북한 주민들 일상에 영향을 주며 북한에도 유행이 생겼다죠? 규리 씨는 한국 문화가 머리 모양, 화장법, 옷 입는 것까지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다 반영됐다고 전합니다. 청년들 사이에서 남한 말투를 쓰는 사람은 ‘깬’ 사람으로 평가해줬는데,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많은 것이 달라졌답니다. 특히 규리 씨는 자신이 직접 겪은 단속과 통제 상황을 전합니다.
(현장음-강규리) 코로나 시기에 정부에서 되게 통제를 심하게 하고 심지어는 (핸드폰을) 보다가 현장에서 걸리면 총살까지 하는 그런 감시가 너무 심해졌어요. 제가 알고 있던 몇 명의 젊은 애들도 19살, 20살, 23살 애들도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걸 보는 우리 마음은 너무 아프고 우리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서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 (최윤서) 저희 있을 때는… 북한은 일반적으로 다,나,까를 써요. ‘이랬습니다’, ‘가져왔습니까?’ 이렇게 쓰는데 한국말을 쓸 때는 ‘요’를 붙여요. 북한에서 핸드폰 검사는 언제든 무작위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젊은 세대를 세워서 핸드폰을 봤을 때 문자에 ‘요’를 붙이거나 어감상 느낌이 있잖아요? 그게 조금 익숙하지 않으면 바로 통제했었어요. 제가 지금 그 사형 얘기를 듣다 보니까 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지금 너무 힘들어서… (박수 소리)
관객들이 박수로 윤서 씨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하지만 눈 앞에서 총살을 봤다는 규리 씨는 담담히 이런 말을 남깁니다.
(현장음-강규리) 우리한테 막 압박감을 주고 그러는 것 같은데 우리 세대는 그런 걸 상관 안 해요. 저는 매번 나갈 때마다 청년동맹 일꾼들한테 단속되고 했는데 하지 말라는 머리를 무조건 하고 다니고, 하지 말라는 바지 옷차림도 무조건 했어요. 왜냐하면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고 그렇다고 안 하는 애들을 저는 못 봤습니다. 그걸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Closing Music-
규리 씨는 북한에서 떠날 때가 아니라 북한에서 사는 게 두려워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탈북 과정에서 잡히는 것보다 고향에서 그대로 사는 것이 더 두려웠다는 얘기인데요. 규리 씨의 말에 관람석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사는 게 두려운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