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붉은 손톱달(1)
2024.11.05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가을이 되면 다채로운 축제가 남한 전역에서 펼쳐집니다. 꽃, 특산물, 제철 과일 등 다양한 대상들이 축제의 주제가 되는데요. 우리 말, 한글 역시 축제의 주제가 됐습니다.
제주도 사투리부터 북한 사투리까지 한반도 전역의 특색을 갖춘 각 지방의 사투리가 ‘말모이 축제’라는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올해 벌써 6회째를 맞고 있는 축제는 9월 24일부터 11월까지 열리는데요. 축제에선 사투리로 엮은 연극도 상연됩니다.
북한 사투리로 엮은 연극도 무대에 올랐는데요, 제목이 ‘붉은 손톱달’입니다. 오늘 <여기는 서울>에서 소개합니다.
[현장음] 여기 서 있으면 되는 겐가? / 옳다! 여기에 있어서 노래 부르면 된다. / 재까닥 재까닥 움직이라는데 어찌 그리 매사 느려? 직행임까? / 저 여자 앙까요? / 내는 모른다. 니 직행이니? / 글쎄 그걸 잘 모르갔는디 중국에서 한 번 돌아쳤시요. / 니 말씨가 앞쪽 사람이구나. 아주 먼 길을 왔구나..
이곳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한 소극장, 연극 ‘붉은 손톱달’ 공연이 한창입니다. 연극은 남한에서 성공한 탈북민 선화가 주인공입니다. 변리사로 성공한 선화가 탈북 10년 만에 전문직 탈북 여성으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며 겪는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변리사는 아마 북한에는 없는 직업일 듯한데요. 상품 등에 대한 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또 상표권 등의 업무를 대행해 주는 일종의 법률 전문가입니다.
‘붉은 손톱달’, 이 작품을 쓴 사람도 탈북민 출신 김봄희 씨입니다. 봄희 씨는 연출가이자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김봄희] 이 연극은 FM 3.08이라는 제목으로 초안이 작성됐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선화가 라디오에 출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화의 삶을 좀 더 조망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작품 제목이 변경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붉은 손톱달’로 갔는데 사실은 달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지만 저희가 보는 대로 그냥 갖다 이름 붙이는 거잖아요. 어쩌면 북한이탈주민들 또는 다수의 집단에서 어떤 소수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보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자기네가 믿는 걸 그냥 보는 것은 아닌가’라는 마음으로 ‘붉은 손톱달’이라고 제목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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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는 연극 초반부터 나타납니다. 주인공 김선화는 어느 날 한 방송국 직원의 연락을 받습니다. 선화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사안으로 연락한 것으로 알고 만났지만 선화를 만난 사람은 라디오 방송 연출가, 그는 선화에게 북한식 말투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며 놀랍니다.
[현장음] 선화 씨? / (선화) 네, PD님?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나 봐요. / (선화) 일찍 오는 건 기본이죠. 급하시다고 해서 달려왔습니다. 무슨 건인가요? / 오! 근데 북한 사투리를 하나도 안 쓰시네요. 제가 만난 분들은 북한 사투리가 아직 좀 남아 있던데요. / (선화) 하나원 나온 지 오래됐잖아요. 10년이나 지났습니다. 바뀌어야죠. / 고향 말씀을 안 하시면 진짜 전혀 모르겠어요.
선화는 업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지만 방송국 직원은 선화와의 만남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는데요.
[현장음] 사실 제가 특허 의뢰하러 나온 건 아니고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 (선화) 네? / 기분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 (선화)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쩐지 제 출신을 너무 쉽게 언급하시더라고요. 많이 궁금하셨나 봐요. 살펴 가세요. / 같이 일을 해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 (선화)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신기한 연구 대상이나 이야깃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 괜찮습니다. /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함께 더 좋은 일을 해보려고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 (선화) 좋은 일이라… 신은 우리에게 참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무기를 줬네요. ‘말’이요. 아무튼 하루 이틀 아닙니다. 이제 눈빛만 봐도 알죠. 근데 우리 피디님은 좀 많이 다른 걸 원하시고 계시네요. / 선화 씨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나 같이 해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방송국 연출자는 선화를 통해 ‘북한 사람다움’에 대해 남한 사람들이 갖는 편견을 보여주는데요. 김봄희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고 합니다.
[인터뷰-김봄희] 어떤 직업에 있어서나 그리고 또 사회생활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해요. 제가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특정한 이미지 안에서, 예를 들면 단순하게는 북한에서 왔는데 왜 함북도 말을 하지 않거나 탈북할 때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를 얘기하지 않거나… 이럴 때 저에게 ‘어, 북한에서 온 거 맞아?’ 이런 질문이 돌아오더라고요.
이런 선입견이 탈북민들에게는 한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김봄희 작가는 이런 상황을 극 중 선화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합니다.
주인공 선화는 회사를 홍보해 사업이 잘되고, 돈도 더 벌고 싶다는 마음에서 결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되는데요. 선화의 말투에 청취자들은 탈북민이 맞냐는 항의를 해옵니다.
결국 선화는 같은 탈북민에게 북한말을 배우기까지 하는데요.
[현장음] (선화) 저 이런 일 하거든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저한테 말을 좀 가르쳐 주시면 될 것 같은데.. /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야… / (선화) 우선 한 번 만나서 가르쳐줄 때마다 10만 원씩 어때요? / 십만 원! 많구나. 근데 니 어째 힘들게 남조선 말을 배우고 또 북조선 말을 배우자고 하니? / (선화) 그러니까 지금 필요해서요. / 너 북한에 다시 가려고? / (선화) 아니 아니요…
선화는 자신이 탈북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데요.
[현장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북한에서 오신 거 맞나요? 김선화 씨요! / (선화) 네. 저는 북한 강원도 원산시 봉춘동에 태어나서… / 근데 왜 지금도 북한 말을 잘 못 하세요? / (선화) 지금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북한말을 사용하는... / 대부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고 인신매매를 당한다고 들었는데 선화 씨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 (선화) 제가 그 질문에 왜 대답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북한 말씨로 또 과거의 고통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탈북민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선입견에 마주한 선화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고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런 점을 관객들이 조금은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붉은 손톱달’의 연출가 손아진 씨입니다.
[인터뷰-손아진] 선화가 이 작품 안에서의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다 외부 인물이거든요. 근데 그 외부 인물들이 선화에게 주는 압박이나 어떤 인식이나 프레임들이 있거든요. 근데 그러한 모습들을 밖에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북한이탈주민 선화를 보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어떤 인식을 갖고 보고 있는지’ 스스로 되게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고요. 선화라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를 대할 내가 선입견, 인식을 갖고 대하지 않나 곱씹어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Closing Music-
선화는 정체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청취자를 향해 결국 큰 소리를 내고 연극은 절정에 달하는데요. ‘붉은 손톱달’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