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소녀, 엄마꽃으로 피다 (3)
2024.10.29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힘들고 아픈 순간도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죠.
탈북민들에겐 벌써 20년이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도 몸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그날들을 기억하고 있는데요. 당시 11살 소녀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은주 씨도 그렇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자신과 가족의 얘기를 ‘11살의 유서’라는 책으로 펴내, 그 아픔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은주 씨의 얘기, <여기는 서울>에서 전해드립니다.
[현장음] 긴 여정을 지금까지 얘기해 봤는데요 이제 10분 잠깐 쉬었다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밖에 프론트 가시면 다과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편하게 즐기시고 40분까지 다시 입장 부탁드립니다.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한 탈북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는 ‘2024 벽을 넘은 인터뷰’, 세번 째 주인공으로 나선 김은주 씨는 함경북도 은덕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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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30분 동안 20년 전, 11살에 경험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시기를 어떻게 헤쳐 나왔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됐는지에 대해 들려줬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요. 관객들은 은주 씨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들어봤습니다.
[관객인터뷰-이정우] 마곡에 사는 회사원 이정우라고 합니다. 북한이 어렵다는 거는 알고 있고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이 굶주려서 아사자도 나왔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어요. 이 자리를 통해 실제 겪었던 고통, 절박함이 많이 와 닿았어요. 그냥 신문 기사로 보도되는 이야기와 실제로 탈북했던 분들이 말하는 경험을 들었을 때 ‘아 정말 너무 어려운 그런 고통의 어떤 시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좀 많이 갖게 됐습니다.
이정우 씨는 평소 북한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탈북민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엔 북한 관련 보도에 관심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은주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통일을 위해 그리고 탈북민을 위해 좀 더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답니다.
[관객인터뷰-이정우] 북한을 탈출하면 (탈북민들에게) 자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중국이라는, 오히려 더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겪는 일이 충격이었어요. ‘아! 북한만 탈출하면 되는 게 아니고 한국으로 오지 않는 이상 (위험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할 거라는 생각이 좀 들어서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살고 싶어서 중국으로 향했지만 탈북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원치 않았던 결혼이었고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북송을 피하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는 이정우 씨. 정우 씨에겐 은주 씨의 이야기가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남한 관객 김민정 씨. 은주 씨가 말한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자리였다고 하는데요. 민정 씨의 얘기 들어보시죠.
[관객인터뷰-김민정] 직접적으로 듣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하신 얘기 중에 우리 남한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자유의 혜택을 받았다는 거, 그 자유를 저희가 항상 누리니까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그 소중함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분들은 목숨을 걸고 나오시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박수도 보내드리고 싶고 항상 응원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자기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이고 또 아직 젊잖아요. 그래서 저희와 같이 어울려서 좋은 일 많이 하시고 꼭 꿈을 펼쳐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은주 씨가 무대 위에 앉았습니다.
은주 씨의 이야기를 들은 관객들이 궁금한 점을 직접 질문하는 시간인데요. 첫 질문이 ‘남북 사람들 사이의 인식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입니다.
은주 씨는 이번에도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요즘 탈북한 분들은 적응을 빨리하는 편이지만 과거엔 쉽지 않았고 그 이유가 바로 ‘자유’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겁니다.
[김은주] 자유가 없던 곳에서 자유가 있는 사회로 와서 이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면 될 것 같은데 자유를 누릴 줄을 몰랐어요. 약속을 잡는 것도 제 선택이고 약속을 지켜야 되는 것도 자유의 일종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과거에 북한에서는 어떻게 보면 자기 살고 있는 지역 그곳을 벗어나면 완전 자유로워요. 무제한의 자유! 물론 뭐 김일성을 욕하거나 이게 가능하다가 아니라 터치를 안 받는 거죠. 특히 꽃제비를 하거나 중국으로 넘어갔거나 이러면 그걸 자유라고 표현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크게 제약이 없었던 거죠. 심지어 인신매매로 팔러 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오면 일상에서의 내가 해야 하는 일정이 있고 내가 지켜야 되는 것들이 많아진 거예요. 뭔가 틀에 갖춰진 삶이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답답하게 느껴지고 약속 지키는 게 그래서 힘들고… 이런 것들을 많이 이 겪었어요. 초기에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 그 이후에 막 들어오신 분들에게는 그런 어려움들이 많았고 그래서 트러블도 많았죠.
하지만 요즘은 이런 생각의 차이가 현저히 줄었답니다. 사실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게 은주 씨의 설명인데요. 알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간극을 좁혀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 중 공통된 것은 은주 씨가 ‘한국에서의 삶을 만족하고 있는가’였는데요. 은주 씨의 답변은 뭘까요?
[김은주] 저는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고 살아가고 이런 것들을 상당히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북한과 비교했을 때 ‘이게 정말 대한민국이 가장 좋은 거야’라고 제가 생각하는 것은 ‘노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노력을 해볼 자유도 없어요. 나의 노력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삶이 나한테 주어지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고 그 결과는 내가 노력한 것만큼 나온다는 것. 노력한 것만큼 얻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저는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묻습니다. ‘청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딱 한 가지를 꼽는다면 무엇인가’.
[김은주] 북한 인권을 얘기할 때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정말 당황스럽게도 북한이 미사일 실험하면 그 화살이 탈북민에게 꽂힙니다. 그런 거 볼 때마다 참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인권을 얘기할 때는 북한 정권과 주민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좀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한 가지 부탁이라고 하면, 제가 인권 활동을 많이 하는데 끝나고 나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말 잘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거에 정말 감사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로 인해서 더욱더 감사하게 됐다면 좋은 거죠. 하지만 그건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거는 ‘잘 들었습니다. 잘 알게 됐습니다. 동참하겠습니다’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신 이야기를 아내, 남편, 자녀, 친구에게 들려주시고 SNS도 올려주세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세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동참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2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북한 주민들이 있기에 은주 씨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 개선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가능하기에 동참을 호소하는데요. 은주 씨는 자신의 목소리가 북한에도 전해지기를 바라며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Closing Music-
이제는 서른이 넘은 은주 씨가 11살에 유서를 써야 했던 어린 은주 씨에게, 그리고 북한에 있는 또 다른 어린 은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김은주] 아마 11살 정도면 북한과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알 거고 자유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북한 주민들에게도 자유, 인권에 있어서 좀 뚜렷한 변화들이 보이고 있거든요. 물론 정권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시민들 자신에 의한 변화입니다. 아래로부터 변화인데 그런 것들이 있어서 ‘살아만 있어줘’는 당연한 얘기이고 그걸 넘어서 자신의 자유, 이를 위한 행위를 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끝내 너는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