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소녀, 엄마꽃으로 피다 (1)
2024.10.15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매년 10월 둘째 토요일은 세계 호스피스 완화 의료의 날입니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란 말기 암 등 위중한 병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가 고통 없이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입니다.
이날은 인생을 살아가며 ‘어떻게 하면 잘 살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데요. 이미 11살에 죽음을 고민하고 유서를 썼던 소녀가 있습니다. 이제는 두 딸의 엄마로 훌쩍 큰 소녀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여기는 서울> 오늘 이 소녀의 얘기 들어봅니다.
[현장음] 안녕하세요. 김은주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11살의 유서>라는 책을 쓴 공동 저자로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책은 제가 탈북을 해서 북한에서의 경험 그리고 탈북을 해서 중국에서의 이야기들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 정착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탈북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 같고 또 북한의 인권 실태를, 북한의 실태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 북한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것이 탈북민과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게 나로 선택되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을 해서 이 책을 썼고 그 덕분에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이곳은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위치한 남북통합문화센터 1층 강당.
11살에 유서를 썼던 소녀 김은주 씨는 이제 30대, 두 딸의 엄마가 되어 대중들 앞에 섰습니다. 대학 재학 중이었던 2013년, 고난의 행군 시절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출판했던 은주 씨가 바로 ‘2024 벽을 넘은 인터뷰’ 두 번째 주인공입니다.
‘벽을 넘은 인터뷰’는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의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는 자리로 이번에는 한반도 청년 미래 포럼 박준규 대표가 사회자로, 회령 출신의 김나연 씨가 보조 참여자로 함께 합니다.
함경북도 은덕 출신의 은주 씨는 1999년 탈북해 2006년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인터뷰는 은주 씨의 책 얘기로 시작합니다. 은주 씨는 왜 11살 어린 나이에 유서를 쓰게 됐을까요? 은주 씨는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하는데요. 그녀의 이야기, 직접 들어 보시죠.
[김은주] 북한에서 흔히 말하는 ‘고난의 행군’, 대기근 시기였고요. 주변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저희 아빠도 영양실조로 돌아가셨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집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엄마가 언니랑 같이 식량을 구하러 간다고 집을 나섰어요. 저한테 15원을 주면서… 그래서 제가 장마당 시장에 가서 두부 한 모를 사 왔어요. 아껴 먹어야지 했는데 한 입 먹고 뒤돌아서서 또다시 먹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두부 한 모를 다 먹어 치우고 그때부터 엄마를 기다리기 시작한 거죠. 엄마가 떠날 때는 빠르면 하루, 길면 3일 걸린다고 하셨거든요. 하루 지나서부터 저는 엄마 마중을 나갔어요. 나진 선봉은 당시 중국과 개방한 도시였는데 중국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었어요. 엄마랑 언니가 그곳을 갔고 그래서 저는 왕복 2시간 거리인 그곳까지 매일 걸어갔어요. 그렇게 3일 지나고 6일째 됐어요. 사실 저는 그때 두부 한 번 먹고 아무것도 못 먹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6일째 되는 날, 엄마 마중을 갔다 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나 내일은 엄마 마중 못 나가겠구나’. 몸에 너무 힘이 없었거든요...
은주 씨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왔다고 느꼈다는데요. 11살 소녀에게 죽음은 어땠을까요?
[김은주] 사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어요. 11살이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래서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대신 엄마가 나를 버렸구나, 그 생각에 너무 슬펐어요. 억울했어요.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엄마가 돌아온다면 내가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유서를) 쓴 거죠. ‘유서’라는 개념도 없이 내가 엄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속상했는지, 슬펐는지 전하고 싶다는 그 마음으로 써 내려갔어요.
보조 사회자로 함께한 김나연 씨는 2천 년 생입니다. 은주 씨와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인데요. 은주 씨의 10대가 배고픔과 죽음의 기억이었지만 나연 씨의 유년 시절은 조금 다릅니다. 나연 씨의 얘기도 들어볼까요.
[김나연] 어머니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는데 저를 임신하고도 장사를 하셨어요. 저희 외할머니도 쌀장사를 하셨고 저희 친가 쪽도 ‘장사를 하면 먹고 살 수 있다’는 게 상식이라 거의 다 장사를 하셨죠. 그래서 저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걸 어렸을 때는 잘 몰랐어요. 저는 그냥 유치원 끝나면 장마당 가서 놀고 그랬던 것 같아요.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된 활기로 가득 찬 장마당. 은주 씨의 유년 시절에 비하면 나연 씨의 유년 시절은 그야말로 ‘꽃’입니다.
[김나연] 이건 작은 에피소드인데요. 제가 외동딸이어서 사랑을 많이 받았고 좋은 거, 예쁜 건 다 제가 차지를 했었어요. 머리핀 같은 것. 그때 당시 중국산 제품들이 구하기 귀한 거였는데 저는 그런 걸 하고 다녔어요. 당시에 좀 화려해 보이거나 뭔가 뺏을 게 있어 보이면 꽃제비 친구들이 탐냈어요. 하루는 혼자 걸어가다가 꽃제비 무리를 마주하게 됐는데 무서워서 핀을 꼭 쥐고 그렇게 하고 다녔던 일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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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제비를 만든 건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였던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살기 위해 장마당으로 모였습니다. 사실 은주 씨 자신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피할 수 없는 길이었을 겁니다.
[김은주]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이 아사했는데 그때 대부분의 아사자들은 장마당에서 장사를 할 줄 모르고 국가의 배급에 의존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 시장은 불법이었고 비법이었어요. 반사회주의적 행동으로 낙인되다 보니까 당을 따르던 사람들은 차마 (장사를) 할 수 없었고 옥수수 하나 못 훔쳐 왔어요. 그런데 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불법이라고 하는 걸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 시기에 정말 많은 사람이 그냥 앉아서 굶어 죽고 나서 장마당 활동이 활발해지고 오늘날에는 장마당이 어느 정도 합법화되어 있죠. 그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꽃제비 아이들, 저도 꽃제비로 불려지기도 했었는데요. 꽃제비 아이들은 부모한테 버려졌거나 부모의 집에서 뛰쳐나왔거나 엄마랑 있어 봤자 굶을 일밖에 없으니까… 아니면 부모가 식량 구하러 갔다가 저희 엄마처럼 돌아오지 않았거나, 물론 저희 엄마는 나중에 돌아왔습니다만 그 부모가 일찍 죽은 경우도 많았죠.
은주 씨도 나연 씨도 함경북도 출신이지만 은덕과 회령이라는 지역의 차이,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같은 장소를 다르게 경험했는데요. 은주 씨의 고향인 ‘은덕’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오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힘들기로 소문난, 돌아가면 못 돌아온다는 바로 그 ‘아오지 탄광’이 위치한 곳. 은주 씨는 고향 이야기도 관객들에게 들려주는데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요?
[김은주] 정말 고난의 행군 전까지는 따뜻한 기억들이 많았어요. 아빠가 어깨에 목마를 태우고 인파를 뚫고 영화관에 들어가서 전쟁 영화 본 기억도 나고요. 아침 일찍이 일어나면 싫을 법도 한데 아빠랑 같이 토끼 풀 뜯으러 이슬에 신발 다 젖으면서 간 것도 저한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고요. 또 어쩌다가 직장에서 국수 표를 주면 국숫집에 가서 농마 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Closing Music-
아버지와의 추억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강을 건너 중국으로 다시 한국에 오기까지 은주 씨와 가족들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