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의 주간진단] 빛바랜 7.4남북공동성명
2024.07.04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올해 7월 4일은 남북 7.4공동성명이 발표된지 5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을 핵심으로 하는 7.4납북공동성명의 현실은 암울하다는 관측입니다. 한국의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살펴 보겠습니다..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MC : 안 박사님께서는 북한에 계실 때 7.4남북공ㄷㅇ성명을 들으시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안찬일: 네, 저는 1974년 7월 4일 그날에도 여전히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안 북한군 3사단 민경대대 민경초소(GP)에서 총을 들고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대남확성기 방송에서 “지금 중대방송을 보내드리겠습니다.”이러더니 “남과 북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통일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내놓게 되었다”며 7.4공동성명을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무력통일만을 말하던 북한 방송에서 이른바 평화통일방안이 나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잠시였지만 정말 가슴 설레이던 순간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MC : 그런데 그 성명이 나온 후 북한군은 어떤 형태로든 좀 달라졌나요?
안찬일: 네, 오전에 성명이 발표되고 나서 점심 식사 후 정치상학이 진행되는데 정치군관의 강연 제목이 “당이 평화통일 구호를 높이 들면 들수록 전투준비, 전쟁준비를 더울 강화하자”는 특별강연회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연 제강을 이미 프린트되어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통일 희망으로 가슴이 뛴 시간은 채 두 시간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군인들은 저건 기만전술이고 전쟁으로만 통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MC : 그럼, 평양정권은 일단 대화전략으로 나가보자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군요. 동시에 서로 비방중상하는 대남대북방송을 끄기로 한 거군요?
안찬일: 네, 아닌게 아니라 얼마 후 남과 북흔 대북 대남 확성기 방송 스위치를 동시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서운한 지 몰랐습니다. 나무와 갈대만이 우거진 비무장지대 안에서 확성기 방송 듣는게 유일한 낙인데 그걸 멈추니 군인들이 겉으로 표현은 못해도 모두 입이 한 발씩 나와 버렸습니다.
MC : 7.4남북공동성명은 어떤 배경으로 세상에 발표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찬일: 네,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남북한은 한국적십자사의 정홍진대표와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을 실무자로 하여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접촉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방문을 비롯해 5월과 6월 사이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대신한 박성철 제 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실현되면서 남북한 간의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1972년 6월 29일 이후락과 김영주는 그동안의 회담내용에 합의·서명하고, 7월 4일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MC : 7.4남북공동성명의 구체적 내용은 어떻게 되나요?
안찬일: 네, 공동성명은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북 쌍방이 자주·평화통일·민족적 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대하여 합의하고, 그에 기초하여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중지하고, 불의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며,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고,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 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고,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 전화를 설치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통일의 원칙으로 o 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o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그리고 o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습니다. 남북한이 분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합의한 당시의 이 3대 원칙은 이후 남북한 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됐습니다.
MC : 그 당시 공동성명 실천을 위한 구체적 행동도 뒤따랐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안찬일: 네, 이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분단 2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대화의 통로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10월 유신(1972년 10월 17일)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채택(1972년 12월) 등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이 공동성명의 의미가 퇴색됐고, 급기야 1973년 8월을 계기로 조절위원회마저 중단되었습니다. 평양정권은 애초에 통일엔 관심이 없었고 김정일로의 세습에 이를 이용하고 나서 남북대화 무대를 치워버린 것입니다. 한편, 1991년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도 3대 원칙이 언급되었으며 1990년 9월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도 이 원칙에 따라 이뤄졌지만 모두 형식에 그쳤습니다.
MC : 그동안 북한 당국은 “조선은 하나다”는 구호를 참 많이 불렀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조선은 두 개다”로 돌변했을까요?
안찬일: 참 세상은 묘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토록 민족은 갈라져 살아선 안 된다던 평양정권이 이제 둘로 쪼개져 살자고 애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 해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아예 남조선은 ‘불변의 적’이라며 증오심을 극대화 시키더니 노래와 상징에서 통일, 더 나아가 애국가에 있던 삼천리금수강산이란 말까지 삭제해 버렸습니다. 평양 입구에 있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거대한 화강암 상징물을 폭파시켜 버렸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과 김정일 위원장이란 조상의 얼굴에 침을 밷어 버린 것입니다. 또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서 분단의 장벽으로 남겨질 장벽을 쌓기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모두 북한보다 40년 이상 발전된 대한민국의 문명이 북한으로 범람해 오는 것에 따른 두려움 때문입니다.
MC :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찬일: 수고하셨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