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은] 북 손전화, 온 가족이 돌려쓴다?
2024.05.16
RFA에서 보도된 북한 주요 내부 소식을 보도 기자와 함께 심층 분석해 보는 <지금 북한은>,
이 시간 진행에 이예진입니다.
-집 팔아서라도 손전화는 사야
-온 가족이 돌려 쓰는 손전화,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라 명태가 잘했다?
-김정은 지방발전 대책 성공하려면
최근 북한 지방도시에 정보기술교류소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지방 주민들의 생활 편의를 위해 생기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데요. 그 배경과 북한 주민들의 손전화 사용 실태 알아봅니다.
최근 김정은 총비서의 지방 경제 발전 정책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자세한 소식 알아봅니다. 손혜민, 문성휘 기자와 함께 합니다.
이예진: 최근 평양 정보기술교류소에 바쳐야 할 수익이 줄면서 북한 지방정부 산하 ‘정보기술교류소’가 지방 도시에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앱, 그러니까 응용프로그램을 돈 받고 깔아주고, 수리도 해주는 곳이 늘고 있다는 건데요. 우선 지능형 손전화기 사용 인구부터 좀 파악해 보죠. 손혜민 기자, 평양만큼은 당연히 안 될 것 같은데, 지방 도시의 지능형 손전화기 보급률은 파악이 됩니까?
손혜민: 우선 북한에서 통용되는 손전화 용어부터 설명해 드린다면요. 손전화라고 해서 동일한 제품은 아니에요. 형태에 따라 막대기(바형)폰, 접이(폴더)폰, 밀기(슬라이드)폰 양면 타치폰(폴더식 스마트폰), 일반 타치폰(스마트폰)으로 분류됩니다. 막대기폰과 밀기폰은 2013년 중국에서 수입된 손전화 기기로 구식 폰이라고도 부르고 있죠. 신형이냐 구형이냐에 따라 손전화 가격이 다르므로 북한 주민들이 사용하는 손전화도 소득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신흥 부유층은 신형 타치폰을 사용하는데요. 수입산 부품으로 조립한 타치폰은 국가에서 판매하는 공시가격이 500달러 정도입니다. 500달러는 북한이 올해 20배 인상한 공장 노동자의 10년 월급과 맞먹습니다. 그럼에도 이동통신 사용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에 의하면 2022년 11월 북한의 이동통신 가입자가 650~700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평양과 지방에서 이동통신 가입자에 대한 통계 수치는 밝혀진 게 없어 정확한 답변은 어렵지만, 농촌을 제외한 일반 지방도시에서 가구당 사용하는 손전화는 1대 정도로 전해졌습니다.
이예진: 식량난이 심각한 북한 사회에서 비싼 타치폰을 구입하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게 놀랍네요.
손혜민: 맞습니다. 지금도 절량세대가 늘어나고 있는 게 북한 현실인데요. 개인적으로도 그 부분이 궁금하여 국경지역에서 전화로 연결된 황해남도 주민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당장 굶어죽는다면서 손전화는 어떻게 사느냐’ 했더니 ‘집을 팔아서라도 손전화는 산다’고 말하더라고요. 먹고 살려면 장사를 해야 하고, 장사를 하려면 가격정보를 수시로 확인할 손전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동통신에 가입된 600만 명 이상이 전부 가격이 비싼 타치폰 사용자는 아닙니다.
평양을 비롯한 소득이 높은 대도시 주민들이 타치폰을 사용하고, 도시에서도 일반 주민들은 가격이 눅은(싼) 막대기폰이나 폴더폰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소득이 높아도 40대~50대 상인들은 타치폰 기능이 복잡하여 비교적 사용이 단순한 구식 폴더폰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중고폰 시장에서 판매하는 손전화는 가격이 싼데요. 30달러에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소득이 낮을수록 중고폰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지역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농촌지역 여성들은 가격이 싼 중고폰도 사용하지 못하죠. 하루 종일 협동농장에 매여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예진: 전 세계 81억명 인구의 90% 이상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고요. 인구 두 명 중 한 명은 스마트폰, 그러니까 지능형 손전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지방도시에선 지능형 손전화를 가구 당 1대가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사용하는 걸까요, 가족들이 필요할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쓰는 겁니까?
손혜민: 네. 그렇습니다. 보편적인 현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평양이나 신의주 등 소득이 높은 도시를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자녀 모두 타치폰을 사용하는 가구가 꽤 있거든요. 그러니 한 가구가 3대의 타치폰을 사용하는 셈이죠.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돈이 많아서 여러 대를 사용하기 보다는 국가보위부의 감청을 피하려는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과 연결되어 수출입 무역에 종사하는 간부들의 경우 보통 한 사람이 2대 이상 타치폰을 사용합니다. 해외시장과 연결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손전화 기기는 국가보위부가 24시간 감청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의도적으로 본인 명의 타치폰과 다른 사람 명의로 폰을 개통해 대포폰으로 사용하며 보위부 감시를 피해 갑니다.
일반 주민들의 경우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가구당 1대의 손전화를 사용합니다. 1보유 다소비 구조라고 말할 수 있죠. 신분증 하나에 손전화 3개까지 개통할 수 있지만, 가격도 비싸고 유지 비용도 비싸니 손전화 1대를 식구가 번갈아 사용합니다. 남편의 명의로 개통했다고 해도 가족 식량을 누가 벌어 들이느냐에 따라 사용 빈도가 다른데요. 국경지역에서는 밀수하는 남성들이 많아 아내보다 남편이 손전화 사용을 많이 하고요. 내륙지역에는 종합시장 매대에서 장사하는 여성, 즉 아내들이 손전화 사용이 더 많다고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도 밖에도 한번 폼 잡으려면 손전화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기회는 엄마가 장마당에 나가지 않을 때 차례진다고 합니다.
이예진: 그만큼 북한 주민들에게도 이젠 손전화가 없어선 안 될 생활 필수품이라는 거겠죠. 이번에 북한 당국이 지방도시에 정보기술교류소를 늘린 배경에는 이런 지방도시 주민들의 편의를 생각한 부분도 좀 있지 않을까요?
손혜민: 전반적으로 본다면 그보다는 정부가 독점한 고수익 시장을 늘리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앱 장터가 확대되는 것인데, 당국이 여기에 개인 자본을 흡수하려는 의도죠. 왜냐하면 정보기술교류소를 운영하려면 자본이 필요하거든요. 손전화에 오락게임이나 도서 앱을 깔아주려면 컴퓨터와 프린터 등이 있어야 합니다. 또 손전화를 수리해 주려면 수입산 부품도 필수죠.
북한이 올해 지방정부 산하 정보기술교류소의 영업 수익 배분을 조정함으로써 양적 증가를 유인한 것도 개인 투자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보기술교류소가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의미는 그만큼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거죠. 지방정부 명의로 개인이 운영하는 정보기술교류소가 공공시설보다 살림집 아파트 일대와 개인 텃밭에 건설되는 사례가 전해지고 있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지방정부의 현금 원천을 늘리려는 것인데요. 올해 북한은 ‘지방발전 20×10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0년 간 매해 20개 군에 지방공업을 건설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죠. 각 지방마다 정보기술교류소를 늘리면 그만큼 현금 수익이 늘어날 것이고, 그 수익이 ‘지방발전 20×10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자금 원천으로 충당될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예진: 지방의 정보기술교류소가 확충되는 걸 보면 지방발전 정책 실행에 어느 정도 가속도가 붙은 모양인데요. 그런데 갑자기 지방발전 정책이 명태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문성휘 기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문성휘: 네. 북한은 올해 전국의 20개 시, 군을 지방발전 시범 단위로 정하고 군 전문 건설 인력인 ‘124연대’와 각 도 ‘청년돌격대’를 동원해 지방공업공장 건설에 돌입했습니다. 지방공업공장들을 살려 올해 말부터 기초적인 소비품을 생산해 주민들에게 공급하라는 것이 북한 당국의 요구인데요. 당장 올해 말부터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공급해야 하는 지방 간부들은 고민이 깊다고 합니다. 지방의 어떤 자재와 원료로 무슨 소비품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이라는 건데요.
지방 간부들의 이런 고민을 헤아려서 인지 지난 3월부터 북한의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고 합니다. 조선노동당출판사를 통해 선전선동부가 매달 발행하는 선전선동 잡지들이 있는데요. 예컨대 지난 3월과 4월의 ‘선동원수첩’, 농업부문 ‘세포비서’ 잡지에는 “황금산이 안아온 기적”, “그때처럼 생각하라” 등의 경험담들이 소개되었는데, 이게 다 김일성 시대인 1980년대 지방공업공장들을 운영하던 경험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북한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되는 간부강연회에서 1980년대의 경험을 되살려 지방공업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지방공업공장들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었는데요. 그러다 1980년대 중반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의 지방산업공장들이 원료, 자재가 없어 생산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1980년대에 마치도 지방산업이 흥했던 것처럼 선전하니 그 시대를 경험했던 주민들은 불편하다는 거죠. 더욱이 김일성이 황금산의 역사를 열고, 지방공업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는데 1990년대 초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고난의 행군까지 덮쳐 지방공업이 몰락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으니 나이 많은 북한의 지식인들은 불편하기 그지없다는 겁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는 지식인들과 주민들은 김일성이 잘 한 것 하나도 없다, 그때는 명태가 있었으니 지방공업이 흥했던 거다, 이런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예진: 지방경제 살리기로 시작된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사상교양이 결국은 김일성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고 있고, 여기에 명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나온 상황인데요. 남한에서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명태가 많이 잡혔지만 명태 하나로 지방 경제의 흥망성쇠를 논할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지금 북한의 지식인들은 왜 당시에 김일성이 아니라 명태 때문에 지방 경제가 발전했다고 하는 겁니까?
문성휘: 네. 북한은 겨울철에 명태를 잡아 대대적으로 가공을 했습니다. 겨울이면 명태를 잡아 그대로 얼린 동태를 중국과 소련으로 수출하였고, 여름이면 말린 명태와 명태 부산물로 만든 명란, 창란을 중국에 팔아 돈을 챙겼습니다. 북한은 소련에 명태를 수출해 원유와 식량을 수입했고, 중국에 명태를 수출해 원유와 식용유를 해결했습니다. 몽골에 마른 명태를 수출하고 대신 양털을 수입해 군인들의 외투를 만들었고, 모방직공장들에 원료를 대주었습니다. 쿠바에 수출한 마른 명태는 사탕가루(설탕)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명태를 수출해 원유, 식량, 식용유, 경공업 원료까지 해결하게 되니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지방마다 닭과 오리를 키우고, 원유가공품으로 화학공장을 돌리고, 철광석을 자체로 소비하니 지방의 철제일용과 목재일용 공장들도 원활하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석탄이 넘쳐나니 연료 걱정도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후변화로 명태가 사라지니 원유를 사들이기 위해 석탄을 전부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학교, 병원, 공장들에 석탄 공급이 중단된 거죠. 지방의 화학공장들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명태가 없으니 군수장비들을 사들이기 위해 철광석까지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철제일용 공장들이 멈춰 섰고요. 식량에 여유가 없고, 사탕가루 수입이 중단되니 지방의 식료공장, 곡산공장들이 멈추었습니다. 된장, 간장도 생산하지 못했고, 사탕, 과자도 더 이상 만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명태가 사라지면서 지방경제가 몰락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예진: 네. 명태를 대신할 자원이 없는 북한, 얘기를 듣고 보니 북한의 지방 발전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김정은 총비서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지방 발전 정책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성휘: 명태라는 자원이 없다고 해도 인민의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충분히 활용하면 얼마든지 지방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외국의 문물은 자본주의 요소가 있어 안 된다, 개인의 의견은 사회주의 원리에 위배되니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빗장을 치면 한정된 자원, 제한된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지방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 문물 교류와 개인의 기업활동을 허용해야 합니다. 국가가 개인의 창의력을 조장하고, 개인에 의해 창조된 부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야 균형적인 지방발전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김정은의 배짱과 자신감에 달려있다, 개인의 창의력을 두려워하면 김정은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준비된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함께해 주신 손혜민, 문성휘 기자 감사합니다.
<지금 북한은>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