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활동가 고미영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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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활동가 고미영 씨(1) 사진은 드팜므 산후조리원 마곡점에서 KT AI 산후조리원 서비스를 체험하는 모델.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시민활동가, 환경활동가, 동물보호활동가 등 각 분야별로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는데요.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이끌어내는 사회운동을 주로 하죠. 탈북민을 지원하는 활동가와 북한인권활동가도 그 중 하나인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여기 참여하고 계신 분들이 꽤 많죠?

마순희: 네, 탈북민들 중에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북한인권활동가들이 제일 많을 것 같은데요. 탈북민 지원활동가나 시민활동가, 놀이 활동가로 알려진 분들도 꽤 계십니다. 그 중 탈북민을 지원하는 활동가로, 또 봉사자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58살 고미영 씨에 대해 오늘 소개해드릴게요.

김인선: 요즘 본업만큼이나 시간을 들여서 봉사활동을 하는 탈북민들이 진짜 많더라고요. 고미영 씨는 언제부터 봉사활동에 전념을 하게 되신 건가요?

마순희: 미영 씨는 2004년에 한국에 입국했으니 올해로 정착 17년차가 됐는데요. 고미영 씨가 탈북민 지원활동가로 일을 시작한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회활동가로 변신하기 전까지 미영 씨는 정착 초반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고 자격증 취득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그렇지만 미영 씨 역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한국으로 왔으니까요. 미영 씨는 탈북-중국-재 입북-재 탈북을 거쳐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1999년 처음 북한을 떠나서 2004년에 왔으니 한국까지 오는데 6년이 걸린 거죠. 그래도 미영 씨의 경우 온 가족이 함께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김인선: 발각될 위험 때문에 가족이 한꺼번에 탈북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워 한다고 알고 있어요. 가족이 함께 하더라도 많아야 2-3명? 그런데 고미영 씨의 경우엔 탈북여정을 함께 한 가족이 많았다면서요?

마순희: 네. 언니네 가족을 포함해 총 7명의 대가족이 함께 했습니다. 보기 드문 사례죠. 일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미영 씨의 역할이 컸습니다. 미영 씨의 고향은 함경남도의 한 시골 군이었는데요. 미영 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집단배치로 평양건설 돌격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범 돌격대원이었지만 미영 씨는 출신성분이 안 좋았던 탓에 입당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미영 씨는 돌격대가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미영 씨의 평범한 일상을 바꾼 건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미영 씨가 아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나날이 힘들어지는 살림을 버텨 나가기 위해서 미영 씨는 9살 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꼭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하고 중국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중국에는 고모님도 계시고 친척들이 있어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달 후 미영 씨는 친척들이 모아준 돈과 물건들을 챙겨 큰 가방을 메고 다시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검문이 소홀할 수 있는 눈이 많이 내린 날에 움직였는데 두만강 강둑에서 북한 군대에 발각돼 다시 중국 쪽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미영 씨는 추격과 추위까지 견뎌야 했지만 가족을 살리기 위해, 특히 아들을 만나기 위해 힘을 냈습니다. 미영 씨는 이틀 만에 살얼음 낀 두만강을 건넜고 무사히 고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영 씨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몇 개월 살아 본 미영 씨는 아이를 위해 북한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친인척이 있는 덕분에 친정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언니네 식구들까지 7명이 무사히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걱정이에요. 탈북민들에게 중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중국에 친척들이 있어도 7명을 한꺼번에 있게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먼저 중국에서 몇 달 지내는 동안 미영 씨는 선교사에 대해 알게 됐고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선교사들은 미영 씨 가족이 숨어 살 수 있게 집도 알선해 주고 보호해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동안 미영 씨에게는 조선족 남편이 생겼습니다. 둘 사이에 아이도 생겼습니다. 가족이 함께 하고 새로운 가정까지 꾸리면서 미영 씨의 삶은 점차 안정적으로 여겨졌지만 불안한 신분으로 늘 조마조마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영 씨는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처음 접하게 됐고 주변 사람들도 한두 명씩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게 됐습니다. 미영 씨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고 이번에도 역시 온 가족이 함께 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미영 씨는 중국에서 지낸 지 4년 만에 조선족 남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두 자녀와 언니네 식구들과 함께 미영 씨는 2004년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김인선: 중국에 머물 때도 한 번도 북송을 당하지 않았고, 7명의 대가족이 움직이는 데도 별 탈 없이 한국에 무사히 올 수 있었다는 건 거의 기적 아닌가요?

마순희: 맞습니다. 기적처럼 무사히 한국에 온 미영 씨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고 중국에서처럼 불안하게 지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한국생활 모든 것이 좋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한국정부에서 탈북민들에게 집을 가족 별로 배정해 주는 덕분에 미영 씨네 가족, 언니네 가족이 각각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착 당시 미영 씨의 나이는 39살! 일도 공부도 모두 가능한 나이였습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애들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고 또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서 배우기도 하면서 열심히 정착했습니다. 미영 씨가 정착 초기부터 일과 자격증 공부 두 가지를 동시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만난 친구 덕분이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친구인데, 미영 씨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해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하게 됐고 자격증까지 딸 수 있었습니다. 간호조무사는 고등학교 학력 이상이어야 지원할 수 있는데요. 간호사를 보조하는 업무와 의사의 진료보조를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간호학 공부를 하고 국가자격시험까지 통과해야 자격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된 의학용어가 많아서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인데요. 미영 씨는 그 과정을 모두 마친 겁니다. 엄마이자 가장이기도 한 미영 씨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에 취업이 절실했습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발급 받자마자 일자리를 찾았다는데요. 미영 씨가 처음 간호조무사로 취직한 곳은 출산을 한 산모와 신생아를 보살피는 산후조리원이었습니다.

김인선: 산후조리원에서는 자격요건을 갖춘 전문 산후조리사가 산모의 회복을 돕는 동시에 영양가 있는 식단을 제공하고요. 산모에게 모유수유법과 신생아 목욕법 등 아기를 잘 돌보는 비법을 교육해 주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엄마와 아기의 건강상태를 24시간 최상으로 돌봐주는 곳이죠. 그만큼 산모들은 편하겠지만 근무하는 입장에선 긴장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도 미영 씨는 아이를 키워본 분이잖아요?

마순희: 네. 하지만 아무리 아이를 키워봤다고 해도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합니다. 아이 돌보는 일은 경험이 있으니 빨리 익숙해졌지만 산모와 그 가족들을 대하는 일,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미영 씨는 남한 문화에 맞는 서비스를 하나하나 차분히 배워 나갔고 점차 업무에 익숙해 나갔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미영 씨는 누구나 인정하는 신생아 전문가가 다 됐습니다. 그런데 3년 차가 되던 어느 날 미영 씨에게 더는 산후조리원에 다닐 수 없는 뜻밖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뜻밖의 문제라고 하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거나 건강악화 문제가 많았는데요. 고미영 씨에게는 어떤 일이 생겼던 걸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 김인선 , 에디터 : 이예진,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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