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이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1)
2024.09.12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9월이 되니 한국에선 왠지 사람들마다 조금은 들떠 보입니다. 긴 추석 명절 연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다가오는 9월 17일이 추석인데 탈북민들 사이에서도 벌써부터 추석 명절을 준비하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지역사회에서도, 봉사단체 등에서도 벌써 추석 행사로 명절 분위기가 한창입니다. 탈북민들이 참여하는 많은 단체와 기관에서는 해마다 임진각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고 있는데요. 제가 살고 있는 양천구에서도 추석을 앞두고 임진각에서 합동차례 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맘때 자원봉사단체들마다 소외 계층이나 독거 어르신들을 위해 송편 나눔 등 추석맞이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는데요. 탈북민들도 한국에 와서 정착하면서 봉사활동에도 정말 많이 참여하고 있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주인공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광명시에 거주하는 탈북민들로 구성된 봉사단체, 하나향우회 회장인 박정옥 씨입니다.
김인선: 봉사활동을 하는 탈북민들을 만나 보면, 처음엔 아무 보상 없이 자발적으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데요. 하지만 한국에 와서 받은 도움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며 정말 많은 분들이 시간이 나는 대로 봉사활동을 하시더라고요.
마순희: 네. 처음엔 박정옥 씨도 여느 탈북민들과 다를 바 없이 봉사활동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2005년 한국에 입국한 정옥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경상남도 부산에 거주지를 배정받았습니다. 부산에서 살다가 5년 후에 광명시로 이사를 하면서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는데요. 분위기에 휩쓸려 봉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나간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썩 내키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북한에 있을 때 지겹도록 시달렸던 사회적 노동이라고 일컫는 여러 가지 동원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학교 때에는 농촌동원, 직장에서는 금요노동, 심지어 인민반에서도 가두 동원 등 갖가지 명색의 동원으로 사회노동을 많이도 했었던 지라 남한의 봉사도 그런 개념인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경험한 봉사활동 현장은 생각했던 북한의 동원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즐기면서 진심을 담아 참여하는 모습이 정옥 씨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이웃들을 위해 성심성의로 땀방울을 흘리고 정성을 다 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 봉사도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동참하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정옥 씨에게 봉사는 일상이 되었고, 몸이 힘들어도 봉사활동은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6년차가 되던 2011년부터는 하나향우회 4대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웃들은 정옥 씨를 우리 회장님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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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자원봉사 같은 의미 있는 활동을 하다 보면 탈북과정에서 남은 마음의 병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다시 느낄 수 있는 보람이 큰 활동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탈북민들 중 직접 참여해 보면서 봉사의 참 의미를 알게 됐다는 분들 많으신데요. 직장생활을 하고 본인의 삶을 챙기다 보면 꾸준히 봉사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옥 씨는 짧은 시간에 봉사가 일상처럼 됐다고 했는데요. 많은 탈북민들이 초기 정착 때 본인 앞가림 하는 것도 어렵다고 토로하는데, 정옥 씨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박정옥 씨도 처음 부산에 정착하면서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제 한 몸 건사하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정옥 씨에게는 두 살, 세 살된 어린 두 딸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오기 힘들다는 한국행을 두 딸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만난 남편의 지원도 있었고 동행하는 분들이 도와준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한 정옥 씨는 하루라도 빨리 탈북 후 결혼한 중국인 남편을 국제결혼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이후 곧바로 돈을 벌어야 했는데요. 정옥 씨의 경우 북한에서 전문대까지 다녔고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자신의 장점을 살려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전문학교에서 세무회계를 공부한 후 자격증을 취득했고 정옥 씨는 곧바로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옥 씨는 사무보조 역할을 하며 매달 고정적으로 523달러, 한국 돈으로 70만원 상당의 월급을 받았다는데요. 탈북민 초기정착 지원금과 월급을 모아 1년이 안 돼 남편을 한국으로 오게 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함께 살던 남편이 한국에 오면 환경이 바뀌어 그런지 불화를 겪는 탈북민들이 많아서 살짝 걱정이 되는데요. 정옥 씨 부부는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정옥 씨 부부는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항상 행복한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남편이 한국에 왔을 땐 더는 힘든 일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한 남편이었기에 가정을 위해 곧바로 경제활동을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특별한 기술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 남편은 하루에 얼마씩의 일정한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일 뿐이었습니다.
김인선: 안정된 일은 아니지만 일한 만큼 정산이 되기 때문에 성실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순 있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정옥 씨의 남편은 성실하고 무엇보다 부부가 합심이 되어 열심히 살았기에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고, 한국에 정착한 지 4년이 되던 해에 정옥 씨에게는 새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이듬해에 아들을 출산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직장 문제로 거주지를 광명시로 옮기게 됐습니다. 좀 더 잘 살아보자고 선택한 길이었는데 정옥 씨는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가기 싫었고 사람들 만나기가 꺼려졌습니다. 아마도 산후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부산에서 정착을 잘 했는데, 갑자기 낯선 지역에 오게 됐으니 한국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겠어요. 새로운 정착에 육아까지, 정옥 씨의 피로도가 상당했겠는데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남편 뒷바라지에 갓난아이를 돌봐야 하고, 위로 두 딸까지 있으니 늘 할 일이 많았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에 정옥 씨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는데요. 그런 정옥 씨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사람들이 바로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우리 탈북민들이 지역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 수 있도록 지역 복지관과 기관에서 다양한 지원과 혜택을 주잖아요? 담당 공무원과 봉사자들이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지원 프로그램 등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정옥 씨에게 봉사활동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했던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정옥 씨는 그 말이 북한에서 하는 동원처럼 느껴졌기에 마지못해 함께 하겠다고 답을 했다는데요. 막상 함께 해보니 마음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습니다.
맡은 역할을 했을 뿐인데 봉사자들에게 ‘고맙다, 이쁘다’ 말하고 좋아하시는 수혜자 분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같은 동향 사람들도 만나게 됐고, 그분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면서 정옥 씨는 활력을 찾았습니다. 탈북민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2011년 6월 ‘새터민향우회’라는 모임이 결성됐고, 정옥 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는데요. 봉사단 창단 구성원으로서 반찬 지원, 지역 안내, 도시락 배달 등의 활동에 꾸준히 참여했고 봉사가 생활의 한 부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김인선: 봉사는 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에게 삶의 변화를 준다는데요.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박정옥 씨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네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