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이 독립된 삶을 살려면 (1)
2024.08.15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9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한반도의 주권 회복과 독립을 기념하는 날로, 국민 모두가 축하하는 날인데요. 남북이 유일하게 공통으로 기념하는 명절이기도 하죠?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에서는 8.15가 해방 기념일인데요. 명절처럼 기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해방된 날보다 4월 15일, 2월 16일, 9월 9일, 10월 10일 등의 기념일들을 더 챙기면서 해방 기념일에는 크게 기념행사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기념 강연회 정도로 지나쳤다고나 할까요. 한국에선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역별로 많아서 탈북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 의미를 되새기며 뜻 깊은 하루를 보냅니다.
김인선: 그렇군요. 오늘은 좀 다른 의미의 독립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 직업이 생기고 돈을 벌면 독립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요즘 부모님은 마음이 반반이라고 합니다. 독립한다니 홀가분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거죠. 탈북민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저희 탈북민들인 경우에도 여느 한국분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에게 지원이나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공시대의 주인공도 바로 그렇게 서로 당당하게 독립해 살아가고 있는 분입니다. 탈북할 때 부모의 등에 업혀 탈북한 아들이 성장해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한국에 와서 태어난 어린 딸이 올해 중학교 3학년 16살이 됐습니다. 전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수재라고 하더군요. 오늘은 2006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경상북도 포항에서 살고 있는 윤혜원 씨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인선: 저도 사춘기 딸을 둔 입장이다 보니 혜원 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데요. 먼저, 함께 탈북한 아들이 독립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청소년기에 갈등이나 부침은 없었는지 궁금하네요.
마순희: 지금은 25살의 청년이 되었고 독립적인 삶을 잘 살아가고 있지만 혜원 씨가 아들의 진로문제를 두고 마음을 쓰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던 2018년경이었는데요. 당시 혜원 씨는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기에 자식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고3이었던 아들이 갑자기 미용전문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아들과 다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혜원 씨의 아들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일반적으로 대학 진학 위주의 교과 교육을 하는 고등학교에 해당됩니다. 워낙 심성이 착하고 공부도 잘하던 아들이었기에 대학 진학은 크게 걱정을 안 했던 혜원 씨였는데,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아들이 느닷없이 미용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입니다. 미용에는 피부 미용, 헤어 미용, 손톱 미용 등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손톱을 예쁘게 장식하는 네일아트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하더랍니다. 혜원 씨는 아들의 말에 갑자기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습니다. 혜원 씨는 남편에게 아들과 있었던 일을 전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끔 아들 좀 설득시켜 보라고 부탁을 했는데요. 그런데 되레 남편이 아들에게 설득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혜원 씨의 마음도 이해 갑니다. 미용 쪽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선입견도 아직은 크고, 대부분의 부모가 일단은 번듯하게 대학에 가기를 바라거든요. 하지만 요즘 아이들, 자신이 꿈꾸는 미래가 확실하면 고집 꺾기도 쉽지 않아요.
마순희: 네. 혜원 씨 아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기가 할 일을 찾지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요. 혜원 씨 남편이 설득 당할 만한 말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들을 지지하면서 혜원 씨는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선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손톱을 관리해주는 네일아트 자격시험을 보는데 남학생은 자신이 혼자였다고, 인기 최고였다고 자랑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영미 씨도 아들의 진로 선택을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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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대학을 나오면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의 꿈과 무관하게 대학에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혀 상관 없는 꿈을 새로 찾아 다시 공부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도 꽤 있거든요. 혜원 씨 아들은 한국에 와서 적성 찾기 힘들어 하는 아이들과 달리 굉장히 빨리 꿈을 찾은 거예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실 감사할 일이죠. 하지만 미용 일이라니 혜원 씨도 처음엔 반갑지 않았던 겁니다. 한국에서는 미용전문가인 남성분도 많지만 사실 북한에서는 남자 미용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요. 저도 한국에 와서 남자 미용사를 처음 봤습니다.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은 남자 미용사들이 많다고 하지만 저는 아직도 여자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더 편하더라고요. 탈북여성들 대부분이 저와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혜원 씨도 그 중 한 명이고요. 그런데 남도 아닌 자기 아들이 미용사가 되겠다니 처음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남편도 강력하게 아들을 지지하고 혜원 씨를 설득할 정도니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진로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혜원 씨도 아들을 지켜봐 주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혜원 씨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에 있는 미용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준비했습니다.
김인선: 일반적으로 아빠들이 딸에게는 한없이 수용적이지만, 아들에게는 엄격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좀 더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의 보통 아빠들은 미용사를 꿈꾸는 아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는데요. 혜원 씨의 남편은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 줄 정도로 시대를 앞선 분이셨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혜원 씨의 남편은 정말 시대를 앞선 분이었고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상한 아빠였습니다. 탈북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혜원 씨 남편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요. 항상 가정을 위해 묵묵히 모든 것을 바쳐 살면서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자상한 배려와 사랑은 누구에게도 비할 바 없었습니다. 덕분에 혜원 씨는 초기 정착의 어려움도, 두 자녀를 키우면서 매 순간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문화적 차이나 자녀교육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남편과 함께 잘 이겨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인선: 그래서 혜원 씨 아들도 자신감 있게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 앞서 혜원 씨가 2006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는데 아들의 진로 문제로 마찰이 있었던 것은 2018년이었거든요.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혜원 씨가 살아온 이야기도 궁금해요.
마순희: 네. 혜원 씨는 남편과 함께 2004년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진로 문제로 잠깐 마찰이 있었던 그 아들이 5살 때였습니다. 아들을 군용 배낭에 넣어 혜원 씨 남편이 어깨에 지고 두만강을 건넜는데 소리를 내면 군대 아저씨들이 잡아 간다고 조용해야 된다고 했더니 아들이 두만강을 건너는 도중에 신음소리 한 번 안 냈었다고 합니다.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고 보니 아들의 몸이 모두 젖어 있었다고 해요.
김인선: 찬 물에 젖으면서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대견하고 고마운 아들이었네요. 하지만 두만강을 건넌 이후에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기에 걱정입니다. 혜원 씨 가족의 탈북 후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