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실패는 해도 포기는 안 해(2)
2024.05.16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임성준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성준 씨는 명장으로 불릴 만큼 손기술이 좋은 분이라고 하셨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성준 씨는 30대에 한국에 와서 처음 기술을 배웠지만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타고난 기술자는 아니었지만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임성준’이라는 이름 앞에 명장이라는 수식어가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준 씨는 몽골을 거쳐 2004년, 한국 땅을 밟게 됐는데요. 당시 성준 씨는 34살, 한창 나이였고 곧바로 일자리를 찾으며 한국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근로 기간이 불확실한 부업이라도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자리를 찾았지만 채용되지 못했습니다. 북한 말투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도 있었고 성준 씨의 성질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것 같으면 참지 못 했고 싸움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대인관계가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 성준 씨는 혼자서도 일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기초교육을 받았던 중장비를 더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했고, 학원을 통해 곧바로 한 회사에 취직이 됐습니다. 하지만 성준 씨는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탄 직후 회사를 나왔습니다. 급여를 받고 보니 회사 사장이 탈북민이라고 남보다 더 적게 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인선: 사실 직장생활하면서 겪는 급여 차이나 차별 같은 감정들은 한국 토박이들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똑같이 입사해도 학력이나 경력에 따라 대우가 다른 이유는 그만큼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인정해 준다는 측면이 있죠. 그럼에도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급여 차이도 있고 진급의 차이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래서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탈북민이라는 차별, 선입견도 그렇게 이겨내신 분들이 많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탈북민이라는 차별과 선입견은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해내서 일로 인정받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에 성준 씨는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자신이 남들보다 급여를 적게 받으니 불만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왠지 억울하기도 했기에 성준 씨는 첫 월급을 타고 바로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성준 씨는 회사를 나온 뒤 새로운 기술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용접기술이었는데요. 중장비 때와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자격증을 취득했고 채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준 씨가 북한 사람이라서 사장님이 채용했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면접을 봤는데, 회사 사장의 부친이 함경남도 함주가 고향이신 실향민 분이라 다른 사람을 제쳐놓고 성준 씨를 채용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이번에는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첫 직장에 비하면 길게 근무했습니다. 성준 씨는 1년 정도 일하고 두 번째 회사에서도 나왔는데요. 하는 일이 늘 같은 용접 일이었고, 더 발전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정도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첫 직장에서 자신이 받은 것이 신입사원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취업한 곳은 창틀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창틀 만드는 일로 개인 사업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성준 씨는 성실하게 근무했습니다. 첫 직장에서처럼 급여의 차이가 느껴졌지만 어떤 대우를 받더라도 끝까지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쉽게 욱 하는 마음으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성준 씨는 1년 정도, 남들의 절반 급여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기술을 배웠습니다.
김인선: 성준 씨가 직장생활을 하는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보통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으면 책임감이 더 강해지잖아요. 혹시 성준 씨에게 가족이 생겼나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성준 씨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착하고 성실한 북한 여성과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성준 씨는 많은 면에서 자신이 변화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동안 혼자만의 삶이라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던 자신이 아내를 만나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알게 되고, 행동에서도 말 한 마디에서도 진중함이 생겨나게 되더라고 이야기합니다. 30대 후반에 결혼해서 몇 년 후 사랑하는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성준 씨는 아빠가 되면서 책임감이 몇 배로 크게 느껴졌습니다.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명백해진 것입니다. 성준 씨는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 쓰고 저축하는 아내를 보며 성준 씨도 번 돈을 쓰는 것보다 저축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모은 돈을 밑천 삼아 개인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어떤 개인 사업이었을까요?
마순희: 네. 성준 씨 부부는 결혼 초, 숙박업소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사람을 쓰지 않고 온전히 두 사람이 모든 일을 해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창틀을 보수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전문가에게 견적을 받아보니 3천4백 달러(약460만원)라는 거금이 나와서 성준 씨는 자신이 직접 자재를 사서 시공을 했는데요. 자재비만 60만원, 440달러 정도 들었고 2천 9백 달러 이상을 절약한 셈이 되더랍니다. 그 일을 계기로 성준 씨는 창틀을 만드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도 잘 맞고 수입도 그만하면 괜찮다는 생각에 창틀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고 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 나갔습니다.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범창도 배우면 좋을 것 같아서 그 기술도 배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남들이 59달러에서 74달러 (8-10만원) 정도 받을 때 성준 씨는 29달러에서 37달러(4-5만원)를 받으면서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성준 씨의 경력이 쌓이고 실력이 늘면서 하루 일당이 크게 늘었다고 하는데요. 10년차가 되면서 40년 가까이 된 전문가들의 일당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기술이 있기에 당당히 일당이 높은 곳을 찾아서 취직할 수 있었고, 어느새 여러 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일할 정도로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차근차근 저축도 해 가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싶었는데 어느 날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성준 씨가 일하던 중 약간의 부주의로 한쪽 손을 크게 다친 것이었습니다. 근육과 힘줄까지 심하게 손상된 부상이었지만 워낙 한국의 의술이 뛰어나다 보니 근육, 힘줄 모두 잘 봉합됐고 지금까지 후유증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김인선: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작업일수록 늘 부상을 조심해야 해요. 특히 기술직은 다치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사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나요?
마순희: 네. 다행히 심하게 다친데 비하면 멀쩡해 보일 정도로 치료가 잘됐기 때문에 일에도 지장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사업에는 좀 변화가 생겼습니다. 회사생활도 해 보았고 개인사업도 해 보았던 성준 씨는, 더 수익이 높지만 훨씬 더 안전한 대형 화물 운송차(냉동 탑차)로 자기 사업을 또 한 번 바꿨습니다. 언제나 한 곳에 정체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 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지역의 모든 탈북민들의 귀감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은 쉽게 하고 돈만 많이 주는 곳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기술을 연마해서 능력으로 승부하라는 임성준 씨!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내일도 역시 같은 마음으로 성공의 가도를 달려 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도 고객이 부르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대형 화물 운송차(냉동 탑차)를 몰고 달려가고 있을 임성준 씨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그의 앞날이 더 밝고 희망차기를 응원합니다.
김인선: 자신만의 기술을 연마해서 능력으로 승부한다면, 어떤 분야에서든 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임성준 씨처럼 말이죠. 몇 년 후엔 성준 씨에게 화물 운송차의 명장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생기는 것 아닐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