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김치 장인이 된 체조선수(2)

서울-김인선 kimi@rfa.org
2024.02.08
[마순희의 성공시대] 김치 장인이 된 체조선수(2) 강영미 씨가 운영하던 김치공장 제품.
/RFA PHOTO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 안녕하세요.

 

김인선: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강영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영미 씨는 체조선수 출신이지만 김치와 인연이 깊은 분이라고 했잖아요?

 

마순희: . 북한에서 리듬체조 코치로 전문 체육인 생활을 했던 영미 씨는 27살에 결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제대군인으로 경제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따라 고향인 평안남도 대도시를 떠나 함경북도로 거주지를 옮긴 영미 씨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는 커 가는데 가정 형편이 점점 나빠졌고, 영미 씨는 남편의 권유로 국경지대로 오가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사기를 당했고 빈 손으로 집에 갈 수 없었던 영미 씨는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한 달만 담배 따기를 하면 장사로 버는 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아들과의 생이별이 되었습니다. 영미 씨는 인신매매로 한족 사람들이 사는 농촌으로 팔려갔고, 몸이 불편한 중국 남자와 강제적인 가정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영미 씨는 살아남기 위해 중국말을 악착같이 배웠고 농촌에 흔한 배추와 무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양념으로 버무린 영미 씨의 김치는 잘 팔려 나갔고 영미 씨는 김치 공장을 차려 8년 동안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중국에 살고 있는 처지라 늘 신변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는 동네 사람들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게 됐고 한국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영미 씨는 김치사업으로 벌어 둔 돈으로 한국으로 오는 선을 찾았고 브로커 비용을 사전 지불한 후 2007년 비교적 안전하게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북한을 떠난 지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김인선: 영미 씨는 중국에서 오래 살다 왔고, 자기 사업까지 하다 온 경험까지 있으니까 한국생활을 잘 해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 영미 씨의 중국 거주 기간이 9년입니다. 그곳에서 영미 씨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중국의 자유경제 시장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고 합니다. 북한처럼 여러 가지 규제로 통제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장사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토지도 50년 임대로 나누어 주어서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지으며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영미 씨는 충격이 컸다고 합니다. 중국은 말이 사회주의지 그냥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생각을 새롭게 갖게 되면서 김치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미 씨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접했을 때보다 한국에 와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북한에서 살 때 남조선에서는 아이들이 구두닦이 소년으로 깡통을 차고 밥을 빌어먹고 산다고 했는데 직접 와 보니 한국은 너무 잘 살고 있었고 러시아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월등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특히 여성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북한에 비하면 가정 일의 부담이 거의 없었고 여성들이 존중 받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여성이 더 많이 일했지만 한국은 남자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세상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뭔가 이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충격이었습니다.

 

김인선: 새로운 체제를 접하면서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영미 씨는 그 체제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잘 찾아냈잖아요. 한국에서도 잘 해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영미 씨는 빠른 속도로 한국 정착을 시작했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처음 잡은 일자리는 정착도우미가 소개해 준 봉제회사의 미싱 일이었는데요. 그 때 한국의 직장 문화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합니다. 직장에 입직하면 직장에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을 전부 가르쳐 주는 북한과 달리 한국에서는 북한처럼 배워주지 않는 것이 영미 씨는 놀라웠다고 합니다. 어떤 직장이든 그 직장에서 내세운 기본적인 업무 소양을 갖춰야 입직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처음 회사에 들어가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었던 거죠.

 

영미 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봉틀을 잡게 됐지만 이번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퇴근한 이후에도 밤을 새워 연습을 계속하면서 단 이틀 만에 웬만한 수준으로 미싱(재봉틀)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부터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영미 씨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지나친 과로로 영미 씨는 몸져눕게 되었고 1년 만에 봉제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 휴식도 취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 영미 씨는 다른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파주에 있는 김치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요. 중국에서처럼 김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영미 씨가 취업한 곳은 조건이 열악해서 파산을 생각하고 있다는 김치 공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영미 씨의 눈에는 중국에서 하던 김치 공장에 비하면 설비도, 위생 조건도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우월했습니다. 영미 씨는 자금난 등으로 파산을 생각하고 있던 회사 사장에게 자신이 자금을 보탤 테니 회사를 공동 운영해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파산 직전이었던 회사 사장은 흔쾌히 수락했고 영미 씨는 중국에서 김치 공장을 하면서 저축했던 돈을 투자했습니다. 영미 씨는 김치 공장 공장장으로 실제 김치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해봤던 일이라고 해서 당연히 잘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영미 씨가 중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김치 사업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중국에서 김치 공장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에 김치에는 자신이 있었던 영미 씨였지만 한국의 김치 공장은 중국의 그것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습니다. 배추를 들여다가 절이고 씻어서 속을 만들어 넣고 포장을 해서 납품까지, 김치를 생산하는데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공정이 많고 손이 가다 보니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해야 하는데 어느 한 공정이라도 마음을 맞추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능률이 오르지 않았고, 물량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먹는 음식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전량 반품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공정에 맞게 배치하고 일을 제대로 하도록 관리 감독하고 제때에 주문 물량을 생산해서 보장하며 작업장을 관리하는 공장장의 업무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치 공장에는 15-20명 정도의 직원이 있었는데 한국 근로자, 탈북민 근로자, 중국인 근로자까지 다양했습니다. 영미 씨는 이들 모두와 잘 지냈고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했습니다. 김치 공장은 나날이 번창해 나갔고 방송사와 탈북민 관련 단체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4-5년간 김치 공장은 바쁘게 돌아갔는데요. 잘 나가던 김치 공장에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습니다. 점심시간에 직원들을 식사하라 보내고 영미 씨는 다음 작업을 보장하기 위한 마늘을 갈았는데, 그만 기계에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급히 병원으로 실려간 영미 씨는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요. 그 순간에도 영미 씨의 생각은 김치 공장 뿐이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도 김치 공장 업무를 봤지만 영미 씨가 빠진 자리는 너무도 차이가 컸습니다. 직원들이 하나, 둘 퇴사했고 결국 회사는 부도로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김인선: 사명감을 갖고 일했는데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를 당했으니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사고로 김치 사업은 아예 그만두게 된 건가요?

 

마순희: . 수술 후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았고 그 이후 재활치료까지 병원에 있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결국 김치 회사는 지난해 문을 닫게 됐고, 영미 씨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영미 씨는 손가락이 잘린 것보다 힘들게 차려놓은 공장이 자기로 인해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라 더 괴롭고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영미 씨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현장에서 일은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김치도 만들고 북한 음식도 만들어서 함께 봉사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다 되었지만 삶의 새로운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영미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 온 강영미 씨. 왕성하게 활동했던 어제도 훌륭했지만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힘차게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그동안 김치로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김치로 사랑을 나누는 영미 씨네요. 봉사활동으로도 김치와의 인연을 맺어가는 영미 씨. 이제는 건강부터 잘 챙기시길 바랄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