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서툴러도 성실히! 나만의 정착방법 (2)
2024.06.27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나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나영 씨는 환경미화 일을 하는 분이라고 했는데요. 지금의 일을 하기까지 여러 직업을 경험한 분이셨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이나영 씨는 2009년 한국에 입국한 후 전라남도의 한 도시에서 정착을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1년 정도 식당 일을 했습니다. 허리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식당을 그만뒀고 수술과 치료를 마친 후에 지인의 소개로 결혼정보회사에 취업했습니다. 2년 정도 근무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지역아동센터 식당 일을 제안 받게 되었습니다. 탈북청소년과 탈북 2세 자녀들, 그리고 지역의 맞벌이 가정 자녀들의 교육과 적응을 돕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나영 씨의 아들은 하교 후부터 시간을 보냈는데요. 나영 씨는 아들 문제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지역아동센터를 찾았고 많은 조언과 격려의 말로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들을 돌봐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나영 씨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시간이 될 때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간식을 만들어서 센터에 갖고 갔는데요. 그 일을 인상 깊게 보았던 센터장이 센터 식당에서 근무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김인선: 나영 씨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나영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있는 식단표에 맞추어서 30인분의 음식을 만들어서 보장만 하면 됐습니다. 한번에 30인분의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 일은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오히려 제대군인 출신으로 몸에 밴 북한식 태도와 말투 때문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요. 밥을 먹으면서 장난을 치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아이들을 지적하고 나무랐던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나영 씨가 불편하고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잘 따르던 아이들도 점점 나영 씨를 피하는 모습에 나영 씨는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서툴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타이르며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을 하면서 점차 관계는 개선되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이전보다 더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과 관계가 좋은 것처럼 자녀와의 관계도 원만했으면 좋겠는데요.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나영 씨 아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마순희: 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던 건 당연한 과정이었을 겁니다. 친구도 없었고 같은 한국말이기는 했지만 억양도 틀리고 공부하는 방법도 놀이도 모두 달랐으니까요. 나영 씨가 어린 아들의 한국생활 적응을 가장 걱정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들을 도와야 하는지 나영 씨는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들 문제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지역아동센터를 찾았고 상담을 하면서 아들의 마음과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고 조언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살아왔기에 나영 씨가 한국에서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는데 지역아동센터는 마음의 안식처가 된 것입니다.
나영 씨는 어렸을 때 군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여군으로 입대하여 7년간의 군사복무를 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군 체신소(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군인 가족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90년대 이후 나영 씨 가정에도 큰 고난이 닥쳤고 갑자기 배급이 끊겼습니다. 평생을 직업군인으로서 나라에서 주는 배급으로만 살아오던 나영 씨 가정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팔아가며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시작으로 큰오빠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오빠까지 가족들이 줄줄이 병마나 영양실조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나영 씨는 어떻게 하든 살아 보려고 난생 처음 장사라는 것도 시작했지만, 사회 물정도 잘 모르는 제대군인 출신인 그가 살아남기는 어려운 세상이었고 어려움은 나날이 더해만 갔습니다. 그때 장사를 하면서 알게 된 브로커가 중국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1998년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돈을 벌기는커녕 인신매매의 덫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나영 씨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조선족 남성이 바로 지금의 남편입니다. 아들까지 낳고 살고 있었지만 숨어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영 씨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됐습니다. 하지만 나영 씨는 북한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두만강을 건너 남편과 아들을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고 더는 중국에서 불안하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남편이 나영 씨의 중국 위조여권을 만들어줬고 입국 과정 내내 탄로날까 봐 긴장했지만 나영 씨는 가족과 함께 무사히 2008년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김인선: 위조여권으로 운 좋게 들어왔어도 탈북민임을 신고해야 한국 여권도 받고, 탈북민 혜택도 받으면서 살 수 있는데, 나영 씨는 어떻게 했을까요?
마순희: 네. 정착 초반엔 나영 씨의 위조여권 비자기간이 5년이라 5년간은 중국 조선족 신분으로 식당에서 일하다가 비자기간이 끝나면 그때 자수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서 그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식당에서 무리하게 일한 탓인지 정착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허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했었잖아요? 막상 수술을 하려고 보니 의료 혜택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알고 지내던 한 탈북여성이 탈북민으로 인정받으면 무료로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면서 자수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영 씨는 1년 후인 2009년 국정원을 찾아 탈북민이라고 자수를 했고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교육과정을 거친 후부터 탈북민으로 다시 한국정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탈북민으로 한국인 신분을 얻게 되면서 탈북민들의 지역 적응을 돕는 하나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요. 주택이나 정착지원금은 물론 정서적 안정이나 건강을 위한 다양한 의료 혜택도 받았습니다. 의료비 걱정으로 미루어 왔던 허리 수술도 받았고요.
김인선: 조금 늦게라도 정정당당하게 한국인으로 의료 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네요. 그렇게 식당 일 1년, 결혼정보회사 일을 2년하고 조금 쉬다가 지역아동센터 급식종사자로 근무했다고 했는데요. 지금은 또 환경미화 일을 하고 있고요. 잠깐 문제가 됐던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아졌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마순희: 지역아동센터에서는 계약직으로 근무했는데 공무원은 정규직이니까요. 급여의 차이는 물론, 지원되는 복지 등 여러 가지 여건이 좋다 보니 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나영 씨는 아동센터에서 8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하다가 2021년부터 시청 환경미화 공무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정년이 보장되고 2년에 한 번씩 순환보직이라 지금 하고 있는 업무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남편도 건강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고, 아들은 지금 전문대에서 첨단 기술을 배워 관련 계통의 회사에 잘 다니고 있어서 걱정이 없다는 나영 씨입니다. 아직 50대 중반이라 10년은 끄떡없이 근무할 수 있을 거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나영 씨의 마음이 저에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아서 제 마음도 뿌듯했고 금년에는 나영 씨를 다시 한번 만나기 위해서 전라남도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행복한 가정과 일자리가 있다면 성공적인 정착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특별함 보다는 평범한 삶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얘기겠죠. 특별해보이지 않아도 나영 씨의 삶에 안정된 가정과 일자리가 있으니 누구보다 성공한 삶이 아닐까요? 나영 씨의 행복한 정착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박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