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에게 찾아온 인생의 전환점 (1)
2024.11.07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11월 7일은 겨울이 시작된다는 의미의 ‘입동’입니다. 한국에서는 입동을 기준으로 김장을 시작하는데요. 입동 전후로 김장을 해야 제 맛이 난다고들 하죠. 하지만 김장을 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줄고 있어요. 먹거리가 워낙 많아 예전처럼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고, 가족 구성원도 줄어들었기 때문에요. 게다가 김장 한번 하면 몸살이 날 정도로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은 필요한 때마다 사먹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맘때 김치 사업하는 분들이 무척 바빠지는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김치사업을 하는 분들 여럿 계시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김치 하면 늘 고향에서 담가 먹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마다 우리 고향에서는 지금 이맘때가 되면 김장을 다 끝내고 남은 부산물인 시래기까지 엮어서 매달아 놓았었는데요. 서울의 날씨는 아직 김치하기에는 좀 이른 시기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금년에 탈북민들이 모여 만든 저희 자조모임에서도 북한식 김치를 만들어서 주변 탈북민들에게 고향의 맛을 전해 드리려고 계획 중인데, 시기를 언제로 할 지는 아직 고민 중에 있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개별적으로 자신이 먹을 김치를 담그는 분들도 많지만 김치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분도 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다가 김치 사업을 시작하게 된 정경일 씨인데요. 지금은 김치 뿐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 사업으로 규모를 확장시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장님이십니다.
김인선: 제가 알고 있는 탈북민 김치사업가들은 다 여성분들이셨어요. 남성분은 처음인데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우선, 정경일 씨가 어떤 분일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자세히 들려주시죠.
마순희: 정경일 씨는 1968년 생으로 2007년 40의 나이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수재였지만 경일 씨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초기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김인선: 탈북민 누구에게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으면 학업이나 취업에 있어 유리한데요. 정경일 씨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고 하셨잖아요. 북한에서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집안 배경이나 신분에 오점이 있으면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경일 씨는 엘리트 집안에서 잘 자란 것 같은데 어쩌다 탈북을 하게 된 걸까요?
마순희: 네, 정경일 씨는 2000년경에 북한에서 무역 관련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1년 정도 체류했었는데요. 지내는 동안 같은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경일 씨는 위법적인 말을 하거나 위법적인 일을 한 것도 없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었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는데요. 불행한 예감은 늘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말처럼 어느 날 그 누군가의 고발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간 후 경일 씨의 아버지는 비행장에서 체포되었고, 경일 씨와 다른 식구들은 모두 시골의 탄광으로 추방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시골 생활이었고 평양에서 고생을 모르고 살아오던 경일 씨 가족에게는 지방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게 생활하는 지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4년이 지난 후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였지만 평양을 떠나기 전처럼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일 씨는 함경북도 지방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여러 명의 중국 사람들이 나와 있고, 또 중국으로 드나드는 북한 사람들이 많은 걸 보게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김인선: 외국 생활을 해본 경일 씨에겐 희망의 탈출구로 여겨졌을 것 같네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이미 외국에서 살면서 북한과 다른 외국 국가들의 차이가 어떠한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경일 씨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요. 자신의 생각을 가족들과 상의하고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계가 삼엄할 때가 아니어서 돈만 찔러주면 얼마든지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경일 씨는 중국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가면 돈을 주고 집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중국에서 지내면서 경일 씨는 한국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는데요. 미국에서 탈북민을 받아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요. 방송에서 미국에 가기 위해 태국에 20여 명의 탈북민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거죠. 이 말을 들은 경일 씨는 홀로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미국에 도착해서 가족을 데려갈 계획으로 북경에서 미국대사관에 들어가려던 경일 씨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습니다. 경일 씨는 북경에 있는 국제 감옥에서 6개월을 지내다가 도문을 거쳐 북한으로 북송되었고, 이후 온성 노동단련대에서 5개월 정도를 보내다가 2월 16일 김정일 생일을 맞아 대사령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경일 씨는 풀려나자마자 가족들이 있는 중국으로 곧바로 향했습니다. 중국에 도착해서 보니 가족들 모두가 한국으로 들어간 뒤였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연락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경일 씨는 먼저 한국에 정착한 가족의 주선으로 태국을 거쳐 2007년 한국으로 무사히 오게 되었고, 그리운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 먼저 와 있는 가족도 있고, 북한에서부터 학력이 좋았으니까 경일 씨가 한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하기는 그래도 좀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경일 씨의 한국 정착은 어땠나요?
마순희: 맞습니다. 어렵다는 생각 없이 한국 정착을 시작했는데요. 세대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착 초기에 경일 씨는 북한에서의 이력 덕분에 한 언론사에서 탈북기자로 일을 하게 됐는데 당시 한 달 급여가 한국 돈으로 90만원, 약 655달러 정도 됐습니다. 북한 돈으로 환산해 보면 어마어마한 큰 돈이었기에 경일 씨는 큰 불평 없이 근무를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또 한국 사회에 대해 알아 가면서 자신이 받는 급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하루 단위로 근로계약을 하고 보수를 받는 일용직 근로자로 일해도 일당으로 100 달러 정도는 벌었고, 한 달에 1,500달러(200만원) 넘게 받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경일 씨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어렵게 한 가족이 만나 그저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세상 더 바랄게 없다는 아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일 씨의 한 달 급여는 탈북민들로 조직된 유명 예술단의 무용수로 일하는 아내의 몇 번의 공연비만도 못한 급여였습니다.
김인선: 비슷한 업무를 해도 회사 규모나 경력에 따라서 급여의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긴 해요. 그래서 관련 분야의 자격증을 따거나 좀 더 공부를 하고 현장 경험을 쌓으면서 이직을 하는데요. 더 나은 조건을 찾는 거죠. 경일 씨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마순희: 네. 경일 씨는 다른 언론사에 새롭게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 급여는 1,238달러(170만원) 정도 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경일 씨 역시 취재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 중에는 김치공장 사장님도 계셨는데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은 정경일 씨의 한국정착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김인선: 삶의 전환점을 맞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경일 씨에게는 ‘사람’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건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