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그녀에게 팬클럽이 생긴 이유 (2)
2024.10.31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박정순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 잘 융화가 되기까지 5년 정도 걸렸다고 말하는데요. 정순 씨는 정착 두 달 만에 해내셨잖아요?
마순희: 네. 2004년 1월, 48살 때 한국에 입국한 박정순 씨는 교원 출신으로 북한에서 거의 직행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도 부족했고, 일상생활에서조차 힘들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다행히 한국에 먼저 온 딸이 곁에 있어서 심적으로나 생활 면으로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요. 교원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적지 않은 나이에 취업도 쉽지 않았습니다. 건강 문제로 입국 후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거주지로 나왔기에 정순 씨의 한국 정착 시작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정순 씨는 두 달 만에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요. 하나원에 있을 때 접했던 종교활동이 계기가 됐습니다. 배정받은 거주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탈북민 정착지원협의회’를 알게 됐고, 전화 상담 봉사활동을 권유받으면서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대면 상담의 필요성을 느낀 정순 씨는 직접 상담센터를 열게 되는데요. 2005년 한국에 정착한지 1년이 막 지났을 때였습니다.
김인선: 2010년부터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 제도가 실시됐으니까 당시엔 정순 씨가 만든 상담센터가 탈북민, 특히 탈북 여성들을 위한 유일한 상담공간이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시작한 상담센터였지만 반응은 뜨거웠는데요.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기관이 되어 갈수록 정순 씨는 배움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순 씨는 대학에 진학했고 사회복지학, 심리상담학을 공부했습니다. 2009년에 석사 학위를, 2014년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자격증을 비롯해 민간 자격증들까지 수십 개의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탈북민을 돕고 지원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이 충분했던 정순 씨는 헌신적으로 상담실을 운영했습니다. 동시에 탈북민과 지역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문해강좌를 통해서 문자해독 교육도 꾸준히 전개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순 씨를 본받겠다는 후배들이 늘면서 정순 씨의 팬클럽 ‘진사모’도 생겼는데요. ‘진정한 사회복지 모임’의 줄임말입니다. 정순 씨를 따라 봉사하고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탈북민들이 모여 정순 씨와 함께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죠. 정순 씨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는데요. 성폭력, 가정폭력 상담소를 만들어 피해를 입은 탈북민들을 위해 노력했고, 쉼터를 만들어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또 대학교 측과 협력해서 탈북민들을 위한 장학제도와 학비지원 등 제도적인 개선도 이끌어냈는데요. 정순 씨는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인 배움의 길을 열어 준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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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한국에서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탈북민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긴 해요. 하지만 학력도 갖추고 자격증도 취득하면서 오랜 시간, 정말 피타는 노력을 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박정순 씨는 북한에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인데요. 북한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함경남도 공산대학에서 1년간 청소년 지도자 교육도 받았기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정순 씨는 한국에 와서 상담이라는 분야와 이름을 처음 접했지만 북한에서 배웠던 그 지도자 교육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고, 비록 한국에서 전문상담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상담센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낯선 이 사회에 과연 자신이 발붙일 곳이 있을까 두려웠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고, 정순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미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었던 정순 씨이기에 컴퓨터 교육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대학도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정순 씨는 수십 개의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자신에게 필요한 분야라면 밤을 밝혀 가면서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에 정착한 지 5년 만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정착 10년 후에는 박사 학위도 받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나 상담심리 같은 학문은 완전히 생소한 학문이었기에 정순 씨는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요. 그것은 상담센터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순 씨는 자신이 공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탈북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대학 내에 탈북민 장학금제도를 실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김인선: 남북의 교육 차이도 크고 북한에서의 학력을 모두 인정받았다 해도 새롭게 혹은 추가로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2배, 3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순 씨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잠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배우고 또 배워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에 무리가 갔고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데요. 그런 노력 덕분에 정순 씨는 다양한 대학에서 담당 교수로 교단에 서게 됐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감개무량했을까요. 정순 씨는 한 강의, 한 강의에 최선을 다하는 교수님으로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정순 씨가 취득한 국가 자격이나 민간 자격 등 크고 작은 자격증이 60여 가지나 됩니다. 자격증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아서 저도 많이 놀라웠습니다.
김인선: 자격증 개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얼마나 성실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는 중요합니다. 60여 개의 자격증은 정순 씨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요즘은 또 어떤 삶을 살고 계실까요? 곧 70을 바라보고 계시잖아요.
마순희: 네. 올해 68살이신데요. 정순 씨는 최근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2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지만 언제든 재발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NK정착지원 상담센터에서 하던 일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는 활동을 하는데요. 지금도 센터와 연결된 전화 상담을 간간히 하고 있고, 또 주변에서 조언을 구하면 성의껏 조언해 주면서 선배로서의 위치를 잘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한 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했던가요. 북한에서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던 박정순 씨는 한국에 와서는 우리 탈북민들의 정착에 도움을 준 상담사 선생님으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으로 그리고 손에서 일을 놓은 지금도 우리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보람찬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고 결국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정순 씨는 오늘도 자신의 일상을 최선을 다 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통일을 위해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통일일군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것. 그것을 죽는 그 날까지 온전히 해내는 것이 정순 씨 일생의 목표라는데요. 그 목표를 향해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박정순 씨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김인선: 주어진 상황에 불평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정순 씨는 불평 대신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았고 해냈기 때문에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