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우의 블랙北스] 김정은 업적 만들기와 연평도 포격 도발
2024.11.13
안녕하세요. 류현우의 블랙북스, 진행을 맡은 목용재입니다. 일주일여 후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14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북한의 도발로 연평도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의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등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희생됐습니다. 이 사건은 같은 해 3월에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과 함께 남북관계를 크게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는데요. 당시 북한 내 상황을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오늘도 류현우 전 대사대리 나오셨습니다.
[진행자] 대사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난 지 14년을 맞게 됩니다. 먼저 청취자분들을 위해 당시 도발에 대한 간략한 개요에 대해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류현우] 네. 먼저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된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그리고 민간인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포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가 피격 직후 북한 영토를 향해 대응사격을 가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 측에서는 해병대원 2명이 전사, 민간인 2명이 사망했으며 19명의 군인, 민간인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한국 군은 해마다 연례적으로 진행해왔던 호국훈련을 2010년 11월 22일부터 30일까지 하기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훈련 개시 이틀째 되는 날인 11월 23일 오전 8시 20분, 느닷없이 북한 군이 자기측 영해로 포 사격이 이루어질 경우 즉각 물리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통지문을 한국에 발송했습니다. 물론 한국 국방부에서는 훈련 중단 요청을 거절하고 예정대로 이를 진행했습니다. 연평도 주둔 해병대가 포 사격훈련을 끝낸 후 10분이 지난 오후 2시 30분경, 북한군이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첫 피격 후 13분만에 한국 해병대가 K-9 자주포들을 재배치해 대응 사격으로 넘어갔습니다. 한국 공군 전투기들까지 출격했고 그 즈음 포격은 중단됐습니다.
[진행자]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정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직접 공격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왜 3월 천안함 폭침에 이어 11월 또다시 이 같은 대형 도발을 일으켰는지,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실 것이 있으실까요?
[류현우] 연평도 포격과 같은 대형 도발을 감행한 이유와 배경은 우선 군에 대한 김정은의 영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010년 9월 28일 조선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이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고 인민군 대장 계급을 수여 받았습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26세의 ‘어린애’가 후계자로 임명된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군복무도 제대로 하지 않는 햇내기가 대장 계급을 단다는 것은 군 장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었죠. 따라서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으로서 군을 영도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증명할 만한 사건을 기획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연평도를 과녁으로 삼은 것은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포병학과를 나온 포병 전문가라는 점이 고려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은에 대한 회의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외무성 직원들 속에서 세습에 대한 불평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6세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친구가 어떻게 당과 국가를 영도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친구도 있었고 김정일의 아들이라고 해서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세습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이건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에도 맞지 않고 또 시대적 흐름에도 맞지 않다고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누구도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당 위원회나 혹은 보위원에게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북한의 세습체제에 대한 모순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진행자] 북한 세습체계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고 최고지도자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인데,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군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외교관들도 3대 세습에는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는 말씀이시군요.
[류현우] 네. 솔직히 외무성 직원들 모두가 세습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외교관들은 해외의 문물을 직접 체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습 독재에 대해 항상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히 외국에 출장을 나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국의 경우도 한 해가 다르게 경제 발전이 눈에 띄게 나타났습니다. 3대를 세습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북한이 연평도 포격 사건을 일으킨 또 다른 배경에는 대내적 요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가 살아있는 기간 아들인 김정은의 후계체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북한 내부의 문제점을 잠재우고 주민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북한이 상투적으로 써오는 방법은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북한 주민들에게 대남 적개심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려면 연평도 포격전과 같은 특대형 도발사건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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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봅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을 잠정 중단하는 정전협정이 체결됐습니다. 그러나 정전협정 체결 시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합의는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연안 수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3해리를 주장한 유엔사령부 측과 12해리를 주장한 공산군 측간의 입장차이 때문이었습니다. 1953년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서해에서 남북 간 무력충돌 가능성을 줄이고, 한국군 해·공군의 초계활동을 한정할 목적으로 지금의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여 북한 측에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조선중앙연감에도 이를 경계선으로 표시까지 했습니다. 1991년 체결된 기본합의서에도 남북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을 인정하기로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일방적으로 그은 서해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NLL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연이어 일어난 2010년은 김정은의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와 맞물립니다. 대사님께서 이 도발은 김정일의 후계 구도 확립을 위한 김정은의 업적 쌓기의 일환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당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류현우]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 첫 등장한 것은 2010년 9월이었습니다. 2010년 9월 28일 노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함으로써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화됐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에 대한 인지도는 아버지 김정일보다 높지 못했습니다. 김정일은 22살 때인 1964년 6월부터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10여 년간 삼촌인 김영주, 계모인 김성애, 이복동생 김평일 등 경쟁자들과 권력 암투를 통해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김정일은 많은 간부들 속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인정 받을 만한 소위 업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10년에 갑작스럽게 후계자로 임명된 김정은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지도는 아예 없었습니다. 김정일의 최측근들도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가 김정일의 후계자로 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2009년 2월부터 김정일이 3남 김정은을 데리고 자주 고위 간부들 앞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고위 간부들도 김정은이 후계자로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갑작스러운 김정은의 등장에 의아해 한 간부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류현우] 네 그렇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단점은 소위 ‘당과 혁명 앞에 쌓아 올린 눈에 띄는 업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 쟁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0년 당시 김정은의 나이가 26세 밖에 안됐으니 간부들과 주민들이 납득할만한 업적이 있을 수가 없었지요. 사실 수령의 업적은 수령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2010년 9월 말 후계자로 임명되었지만 김정은은 자기의 지위와 역할에 걸맞는 업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아들에 대한 업적 쌓기를 위해 충격적인 사건이 필요했고 당시 인민군 대장 계급을 받은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직책에 어울리게 연평도 포격 도발과 같은 군사작전을 기획했던 것입니다. 연평도 포격 직후 김정일은 노동당 간부들과 군 장성들에게 ‘김정은 대장이 대담한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해서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며 추켜세웠다고 합니다.
[진행자] 대사님께서는 김정은의 존재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류현우] 저는 2003년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저의 장인어른이 2002년 2월 16일 김정일의 60번째 생일을 맞으며 그의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모두가 나이가 어렸었습니다. 제가 장인어른께 이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으니 “장군님의 자제분들”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김정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김정은 총비서의 업적 쌓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북한 내부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한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다뤄보겠습니다. 대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