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우의 블랙北스] 김정일 사망, 이틀 후 알려진 이유?
2024.12.11
안녕하세요. 류현우의 블랙북스, 진행을 맡은 목용재입니다. 오는 17일은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날입니다. 북한 독재자의 죽음은 3대 세습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이르면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와 함께 김정일 당시의 북한 내 상황을 오늘과 다음주까지 두차례에 걸쳐 다뤄보겠습니다. 오늘도 류현우 전 대사대리 나오셨습니다.
[진행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13년째인데요.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 엘리트 그룹 내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류현우] 조선중앙TV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17일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사망했다는 긴급보도를 방영했습니다. 당시 북한 고위층 사이에서는 김정일의 사망으로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국정 운영을 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습니다. 정치경험이 하나도 없고 국가 운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북한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등극하면서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후계자로서 북한을 통치했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그늘 밑에서 20년 동안 후계자 수업을 하면서 국정 운영의 경험을 체득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을 앓고 난 후 급작스럽게 후계자로 등극했고 2009년부터 인민무력부와 국가보위부 등에서 후계수업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김정은은 당시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함만 있었지, 당 정치국 위원이나 후보위원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점이 후계자로서 유일한 정통성이었습니다.
[진행자] 당시 김정은 총비서가 후계자로 낙점됐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출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실제 그랬나요?
[류현우]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김정은이 지난 2010년 9월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외무성에서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4명의 직원들이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습은 사회주의 본성적 요구에 배치된다는 것, 또 당과 혁명 앞에 쌓은 업적이 하나도 없는 젊은 김정은이 단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 21세기인 현재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우리 나라의 국호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4명의 직원들 중 누구도 당 위원회나 혹은 국가보위부에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새파랗게 젊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되는데 대해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은이 너무 젊었기 때문에 후계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실망의 시선들이 많았습니다. 2012년 리영호가 정치범수용소로 사라진 원인도 최고사령관 명령 없이 군사 훈련을 위해 부대를 이동시킨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김정은을 가리켜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라며 아내에게 한 말이 그대로 도청됐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장성택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김정은에 대한 북한 엘리트들의 관점은 그냥 ‘어린애’였습니다.
[진행자] 김정일 죽음으로 인해 외무성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류현우]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 17일, 저는 시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사망 소식은 12월 19일 조선중앙TV 중대보도로 발표되었는데 대외 활동 방향은 이틀 후인 2011년 12월 21일 모든 북한대사관에 배포됐습니다. 사실 수령의 사망과 관련하여 이틀이 지난 후에 대외활동지침이 내려왔다는 것은 중대한 ‘사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김정일의 사망과 관련한 대외활동방침을 비준 받는데 시간이 꽤 소요됐던 것 같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외무성은 김정일 사망과 관련해 외국의 국가수반들이 보내는 조전에 대해 누구의 이름으로 답전을 보내야 하며 김정은에게 조전이 온다면 그 직함을 어떻게 표기하겠는지, 또 대사관 등 외교 대표부에서 조의행사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등 대외 활동 방향에 대해 보고문건을 작성하여 본부서기실로 올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준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김정은의 위상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정도로만 인식이 되었지 당, 국가, 군대의 직위가 없었습니다. 즉 김정은이 대외적으로 국가수반급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2인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의전 등과 관련한 문제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직함, 달랑 하나였습니다. 이런 대외적인 문제로 하여 외무성에서도 토론이 많았습니다.
<관련기사>
[류현우의 블랙北스] ‘교통사고 사망’ 북 엘리트들 ‘암살설’ 진위는?
[진행자] 당시 특별히 기억나는 본국으로부터의 지침이 있었을까요?
[류현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대사관의 조의행사 전 과정을 녹화하여 빠른 인편을 통해 평양으로 보내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런데 조의행사와 관련한 녹화촬영은 ‘1호 영화문헌’으로 편집되기 때문에 고화질의 SONY HVR 장비로 녹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1호 영화문헌은 김 씨 일가와 관련된 기록영화를 의미합니다. 알아보니 SONY HVR 장비는 당시 10만 달러가 넘는 고가의 촬영기였습니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대사에게 이걸 어떻게 구입할지에 대해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대사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1호 영화문헌을 편집한다는 데 토를 단다는 것은 조의행사에 대한 태도와 관점 문제로 지적될 수 있었습니다. 대사가 시리아 정부에 부탁하여 촬영기를 보장받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사는 시리아 외교부 장관과 긴급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장관의 위임을 받은 시리아 아시아담당 차관이 대사의 요구를 청취한 후 전화로 영화총국장에게 화질이 높은 촬영기를 보장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날 시리아 영화총국 소속 PD들이 드라마용 촬영기를 가지고 와서 조의행사 전 기간동안 녹화를 했습니다. 지금도 시리아 정부 관계자들과 10여 개 정당 당수들을 만나면서 김정은 앞으로 조전을 보내 달라고 구걸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진행자] 김정일의 사망은 즉시 알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한 매체가 이를 뒤늦게 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됐는데, 북한 매체 발표 전, 뭔가 조짐이나 이상한 낌새는 없었나요?
[류현우] 네. 우선 김정은이 국정운영이나 정치경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본인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갈팡질팡했습니다. 솔직히 당시 조의 관련 일은 고모부인 장성택이 모두 주관했습니다. 김정은에게 올라가는 보고 문건에 대한 답변은 장성택, 김경희에 의해 토론된 후 결정됐습니다. 고위 간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2012년 초까지 만해도 중앙당에서 김정은에게 올라가는 문건은 모두 장성택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김정은은 장성택과 김경희에게 모든 걸 의지했던 겁니다. 장성택을 처형할 때 후계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죄목이 있었는데 사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여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죄목을 붙인 것이라고 봅니다. 당시 장성택은 북한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인민군 대장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서 사법, 검찰부문도 담당했기 때문에 김정은을 없앨 흑심을 가졌다면 그의 권력이 공고화되기 전에 미리 없앨 수 있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사망과 관련한 보도가 늦어지게 된 것은 김정은의 당과 국가, 군대에 대한 지도력 부족, 장성택과 김경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점이 컸다고 봅니다. 12월 15일 김정일은 사망하기 이틀 전 ‘광복지구상업중심’을 현지지도 했습니다. 광복지구상업중심은 당 39호실 산하 대성지도국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의 장인어른이 김정일에게 광복지구상업중심과 관련한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날 김정일은 여느 때보다 더 힘든 기색이었는데 매 층마다 힘들다고 하면서 조금 앉아있다 또 돌아보자고 했답니다. 저의 장인어른은 경호원이 김정일을 부축하는 모습을 보고 2층까지만 보고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김정일은 의자를 가져오라 했다고 합니다. 의자에 앉아서는 혼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하더군요. 김정일은 하루에 담배 2갑을 피우는 골초였습니다. 훗날 장인어른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김정일의 입술이 파래진 것을 보고 건강상태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 고위간부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12월 19일 아침 8시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중앙당 본부 당 위원회 청사로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당과 군대의 책임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저의 장인어른도 그때 김정일의 사망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장성택과 김경희가 김정일의 사망을 철저한 비밀에 붙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틀동안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김정일 사망 당시 해외 공관 조의행사를 고화질로 촬영할 장비가 없어서 현지 정부에 지원 요청했다는 말씀에 북한의 어려웠던 당시 경제 상황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방송에서는 김정일 사망 이후 그가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과 관련한 이야기를 류현우 전 대사대리께서 풀어주시겠습니다. 대사님 감사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