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 청년 사업가의 죽음 (1)
2024.08.22
제시 킴: 제가 벌고 싶은 액수는 한 100억입니다. 딱 100억만 벌면, 저는 30대 100억 벌든 40대 100억 벌든 딱 100억 벌면 저는 손 털고 놀 거예요. 남북한 경제가 열린다 하면 저는 아마도 제일 인기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그 가교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PD: 일단 자기 소개를 해주는데 ‘몇 년도에 북한을 나와서 몇 년도에 중국에 있다가 한국에 몇 년도에 나와서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누구누구입니다’ 이렇게 소개하면 돼요.
제시 킴: 네. 안녕하세요. 2011년에 고향을 떠나 2013년까지 2년간 중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2014년에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여 지금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는 제시키친 대표 제시입니다.
PD: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제시 킴: 저는 도전자인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영어 프로필 속에다 챌린저라고 써놨거든요. 그래가지고 수천 개, 수만 개, 수억 개의 계란으로 그 바위를 깰지언정 멈추지 않고 계속 나가는 것 같아요. 나는 도전가다. 도전자다.
도전가를 자처하며 살아온 31살 탈북청년 사업가 제시 킴. 2014년 한국 입국 후 자신이 잘하는 일을 찾은 끝에 북한에서 흔히 먹던 두부밥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그녀의 꿈은 24시간 생활필수품부터 먹거리를 판매하는 편의점에 자신의 두부밥을 진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두부밥은 탈북민 뿐 아니라 남한 토박이들에게도 입소문을 타며 관심을 끌었고, 두부밥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찾는 이들도 늘었죠. 탈북 선배이자 사업가 박예영 씨도 그녀의 사업가 기질에 감탄을 합니다.
박예영: 제시가 좀 남달랐다고 제가 생각을 했던 건 남과 북의 음식 문화를 잇는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북쪽에서 일명 약간 서민들이 주로 즐겨 먹었던 그런 두부밥을 또 대한민국 국민의 입맛에 맞게 조금 개량을 해서 그렇게 만들어가는 걸 보면서 저는 정말 이 친구 사업가 기질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프로모션하고 어디에서 어떤 권고가 있으면 다 이렇게 제출을 하고 너무 열심히 뛰어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제시는 굉장히 활달하고 밝고 또 적극적이고 진짜 사업가다라는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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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킴: 제가 벌고 싶은 액수는 한 100억입니다. 딱 100억만 벌면 저는 30대 100억 벌든 40대 100억 벌 딱 100억 벌면 저는 손 털고 놀 거예요. 북한에서 왔는데 지지리 못 산다면 ‘그래 북한에서 왔으니까 못 살지. 근데 잘 산다면 어머 북한에서 왔는데도 정말 잘 사네’ 이건 강점이거든요. 그래서 남북한 경제가 열린다 하면 저는 아마도 제일 인기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그 가교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제시 킴 씨의 인생 목표는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 750만 달러를 번 뒤 남은 인생을 즐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힐 정도로 자신이 넘쳤죠. 사실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런 인생 목표와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제시 킴: 제가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8살이었거든요. 8월이면 고향에서 이제 산딸기가 나와요. 이제 산딸기가 엄청 나오는데 동네 오빠가 와가지고 ‘제시야 우리 산에 딸기가 많으니까 울지 말고 딸기 따 먹으러 가자’ 이래서 딸기 뜯으러 갔는데 너무 많은 거예요. 딸기가 여기저기 울긋불긋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따가지고 한 통씩 들고 왔는데, 너무 많으니까 엄마가 보더니 ‘제시야, 이걸 한번 시장에서 팔아보자’ 이래서 내가 장마당에서 쌀도 팔고 고기도 팔고 잡화도 파는 이모님들 찾아가서 ‘아줌마 나 딸기 따왔어. 딸기 사 먹어’ 이러고 그 아줌마들한테 이렇게 막 판매를 강매를 한 거예요. 그때 제가 아마 그 딸기 팔아서 한 15원을 벌었어요. 그 돈을 엄마가 챙긴 것이 아니라 엄마가 제 손에 꼭 쥐어주면서 ‘제시야 네가 하고 싶은 거 이 돈 가지고 다 해’ 이러는 거예요. 엄마가 복숭아를 되게 좋아했어요. 딱 마침 과일 파는 데 복숭아가 있는 거예요. 제가 그 복숭아를 엄마 사드렸어요. 그때 엄마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딱 그때 든 생각이 ‘아 내가 돈을 벌면 엄마가 행복하구나’ 이런 게 너무 이렇게 훅 마음에 왔던 것 같아요. 지금도 너무 생생해서…그래가지고 제가 ‘아 나는 돈을 많이 벌 거야’ 결심했죠.
그렇게 어려서부터 부자를 꿈꿨던 북한 소녀 제시 킴 씨는 자연스럽게 장사를 시작했고, 꽤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시 킴: 고난의 행군을 시작으로 북한 사회가 나아진 역사가 없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내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되겠구나, 이제는 이게 다르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별걸 다 했던 것 같아요. 정말 산에 가서 고사리 뜯고, 산나물 뜯고, 약초 캐고, 개암 뜯고, 정말 이런 거 열심히 하고 나중에는 뭐 약초도 차로 만들어 판매했었고, 외화벌이 나무도 해가지고 이제 당시 물건들 다 제외하고도 현금 1천 달러 이상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고모는 ‘쟤는 사막에다 내려다 놔도 살아갈 애’라고. 맨날 이제 의식주 중에 ‘의’도 해결됐고 ‘식’도 다 해결됐고 모든 게 해결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삶이라는 거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나는 ‘내 삶이 있는 삶을 살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자유로운 내 삶을 살고 싶다’ 왜냐하면 북한은 그 지역이 끝이잖아요. 제가 아무리 많이 다녀도 밖에 북한 밖을 나갈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좀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그런 욕망이 되게 컸던 것 같아요.
제시 킴 씨는 그래서 탈북을 결심했고, 무사히 한국에 와서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했죠.
제시 킴: 70~80년대 과거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40~50년 훌쩍 뛴 미래를 오다 보니까 너무 모르잖아요. 언어도 모르고.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 보고 이제 대학교 입시 준비를 해서 학교 가서 대학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죠. 대학 공부를 대학교 다니면서 하다가 그때부터 들었던 생각이 ‘내가 이 사회에서 생활하려면 이 친구들과 다른 강점이 나한테 있을 거고 이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된다’였어요. 그래서 1년에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게 뭔지 대신 많이 즐겁게 하는 게 뭔지 찾아봤어요. 월 단위, 주 단위, 일 단위로 쪼개니까 음식 관련한 일을 제일 많이 하더라고요. 그게 제일 즐거운 거예요.
자신의 재능을 빨리 알아차린 제시 킴 씨. 탈북민들뿐 아니라 남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만든 두부밥 인기가 높은 걸 보면서 사업을 확장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자금을 지원 받고 사업을 함께 할 동료도 구했죠. 그렇게 제시 킴 씨의 인생도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과연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