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목숨 걸고 한국에 온 이유 (1)

서울-이예진 leey@rfa.org
2024.07.25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목숨 걸고 한국에 온 이유 (1) 2007년 5월, 태국 치앙라이 지방 경찰서에서 탈북자들이 법원으로 호송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REUTERS

김주찬: 결국 돈을 주니까 군인이 친절하게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다 주더라고요. 그래서 98년도에는 목숨 걸고 진짜 죽을 둥 살 둥 넘어왔는데 야 돈을 주니까 군인이 다 이렇게 친절하게 모셔다 주는구나.

김은주: 3, 4년을 중국에 더 살다가 지인이 자기 친구가 브로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가고 싶냐고저희 통화하고 바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3일 만에 출발했어요. 한국행을.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김주찬: 죽음의 그 상황을 그렇게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됐어요. 외할머니 집을 찾아갔더니 어머니가 이제 여동생을 데리고 다시 탈북을 했더라고요. 중국에 있는 어머니하고 통화가 되더라고요. 브로커 통해서 전화해서 여동생 목소리를 들었죠.

 

1998년 처음 북한을 탈출한 청년 김주찬은 두 차례나 강제북송 당하며 감옥에서 죽기 직전 가마니에 둘둘 말려 버려졌다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죽어가던 주찬 씨를 주변에서 도와줘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주찬 씨는 처음 탈북할 때 너무 어려 강을 건널 수 없어 버리고 간 여동생이 이미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고 하는데요.

 

김주찬: 울음도 안 나왔어요. 눈물은 막 흐르는데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이게 가슴이 먹먹하다고 그러잖아요. 먹먹하다는 그 느낌이 먹하고 그냥 멈춰 있는 것 같은그래서아 진짜 내가 빨리 가야겠다예전처럼 생각하고 두만강을 뛰어넘어서 이렇게 가려고 했더니 그게 안 됐고 결국은 중국에 있는 선교사님들한테 요청을 해서 결국 돈을 주니까 군인이 친절하게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다 주더라고요. 그래서 98년도에는 목숨 걸고 진짜 죽을 둥 살 둥 넘어왔는데 야 돈을 주니까 군인이 다 이렇게 친절하게 모셔다 주는구나 해서 아주 조금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두 번째 탈북을 했죠. 그래서 무작정 저는 동생 찾으러 갔어요. 원망도 많이 했다 하더라고요. 지금도 원망하는 것 같아요. 항상 죄인입니다. 얘를 안전하게 남한으로 보내야겠다가 그냥 전부였어요. 생각의 전부가 그거였어서 돈을 열심히 모았어요. 그리고 여동생이 이제 무사히 영사관으로 들어가서 성공한 걸 확인하고 그때야 비로소 나도 빨리 따라가야지 뭐 하다 보니까 좀 시간은 걸렸는데 무사히 와서 대한민국에서 다시 만났죠.

 

2002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2년간 머물다 2005년 한국에 입국한 한유미 씨,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에 가서 열심히만 살던 유미 씨는 생각지도 않게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한유미: 이제 식당에서 알바를 이제 해가지고 돈이 좀 모였어요. 그래서 그 돈을 빨리 북한에 보내주려고 어떻게 어떻게 연결을 해가지고 어머니랑 연락이 됐는데너 그 돈을 지금 보내주지 말고 그 돈을 가지고 남조선에 가라그러더라고요. 경비를 하라고. 할머니가 먼저 가 계시다고 그래서 북한에서 할머니 연락처를 남조선에 있는 할머니 연락처를 저한테 줘서 바로 거기서 전화를 해가지고 할머니랑 이제 연결을 해서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꽤 오래 걸려서 한국으로 왔죠.

 

1999년 어머니, 언니와 함께 탈북해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하던 김은주 씨는 한국으로 가야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은주: 3, 4년을 중국에 더 살다가 지인이 자기 친구가 브로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가고 싶냐고저희 통화하고 바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3일 만에 출발했어요. 한국행을.

 

중국에서 비행기로 몇 시간 안 걸리는 한국, 하지만 도망자 신분인 탈북민들은 베트남, 태국, 몽골 등 제 3국 난민수용소를 거쳐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 년이 걸립니다.

 

장세율: 중국에 체류하던 그런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을 하고 그 사람들이 자기 가족, 지인들, 그런 친척들을 데리고 오면서 브로커라는 그런 이름이 생겨나게 된 거죠. 직업이 생기고 일단 중국에 강력한 네트워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 국경에서 사람을 받아서 안전 지역까지, 안전가옥까지 데려갈 수 있는 이 라인을 가진 사람이 일단 이제 있어야 되고요. 우리가 태국에 들어가면 태국에서 한국인이 불법 체류를 했다 하고 재판을 해서 한국으로 추방하는 그런 조치로 우리를 입국시키거든요.

PD: 그때 한 사람을 탈북시켜서 한국에 데려오는 비용이 대략 얼마였나요?

장세율: 예전에 우리가 2008, 2009년 그리고 코로나 이전에도 400만원대였습니다. 300만원에서 400만원대였는데 그런데 중국에서 태국 내지는 몽골 그런 난민수용소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이 지금은 1800에서 2천만원으로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4, 5배 정도 올랐지요.

 

2000년대 중후반 탈북과 중국행이 급증했는데요. 2005 1382명이었던 한국행 탈북민이 2011년 들어 2706명으로 두 배 가량 늘었습니다. 동시에 탈북 브로커 비용도 급증했죠.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중국의 탈북자 단속이 강화되고, 주요 탈북로가 차단됐으며, 탈북 감시망이 훨씬 더 촘촘해졌기 때문인데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그럼에도 그들이 목숨 걸고 한국행을 택한 이유, 다음 시간에 들어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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