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내 고향 북한(1)
2024.05.16
(노래) 황금이삭 설레는 냇가에 앉아 사랑하는 고향 땅을 바라볼 때면 내 고향이 좋아서 노래 부르는 저 하늘의 종달이 되고 싶었지.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그럼 제가 얼마나 빨갱이였겠어요?”
한용수(1995년 탈북): 그 당시로 보면 김일성 시대에 저희는 일종의 황금기 같은 시대를 살았었죠.
박성진(2004년 탈북): 제 세대나 제 위 세대들한테는 김일성은 인민을 위해서 무엇인가 했던 지도자?
노경미(1998년 탈북): ‘백전백승의 강철 령장이시며 우리 최고의 영도자 세계 만방의 위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이렇게 불러야 돼요.
김혜성(2002년 탈북): 저는 어쨌든 매 학기마다 시험에서 수학하고 영어는 낙제 맞아도 김일성 과목은 100점 만점이었어요. 그건 정말 달달 외울 정도. 내가 시집 갈 때 시집 남자 보는 기준이 뭐였는지 아세요? 군대 갔다와 입당하고, 대학 졸업하고, 정치대학 졸업하고 당간부 된 남자한테 시집간다는 게 내 목표였어요. 그럼 내가 얼마나 빨갱이였겠어요?
강윤철(2015년 탈북): 재미있는 기억이 많죠. 우리 뭐 어렸을 때 유치원 때는 보면 집단체조라는 걸 해요. 북한에서는 4.15(태양절) 행사 이런 때를 맞으면 하얀 신을 신으라고 해요. 저한테는 하얀 신이 없어 엄마 보고 막 떼쓰며 하얀 신 사달라고 막 했는데 우리 할머니랑 어른들이 그러면 ‘야 거기에다가 치약 칠하자’ 해가지고 치약으로 이렇게 두껍게 칠해서 나갔던 그런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김일성 시대를 살았고, 1995년~2015년 사이에 북한을 떠난 40대 이상 탈북민들의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북한에서 경제적으로 그나마 풍요로웠던 시기를 살았던 이들은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어도 그때를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합니다. 그들에겐 그래서 더 1994년 7월 8일이 충격적이었다고 하는데요.
한옥정: ‘어버이 수령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죄다 놀랐어요.
한용수: ‘아 이 사람 죽을 줄 아는 사람이네’ 그랬죠.
노경미: 매일과 같이 김일성 동상이나 김일성이 석고상 그런 데 가서 땅을 치며 통곡하고.
김혜성: 눈물이 안 마르더라고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버이를 잃었으니까 당의 품을 잃었는데 어떡하냐…
김일성 사망?
“너무 억울하고 아파서 울었어요”
(현장음)
한옥정: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같이 모여서 울어요. 또 집에 오면 집에서도 가족끼리 모여 또 울어요. 하루에 몇 번씩 울어봐요. 사실은 미안한 얘기지만 친척이 죽어도 그렇게는 못 울어요. 그런데 우리 아빤 정말 잘 우는 거예요. 옆에서 봤는데 아빠는 ‘어어어’ 이러고 소리 내며 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빠 난 눈물 안 나는데?’ 하니까 아빠가 그냥 머리를 그냥 있는 대로 빡 때리는 거예요. 너무 억울하고 아파서 울었어요.
1994년, 그렇게 김일성 시대가 저물고 그의 아들 김정일의 세습이 시작됐죠. 이미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북한 경제가 파탄 날 즈음 시작된 김정일 시대, 특히 1996년 3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식량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탈북민들은 김정일 시대를 최악의 시절로 기억합니다.
한용수: 처음에 자대 배치 받았을 때는 그러니까 김일성이 죽기 전에는 그래서 쌀도 잘 줬고요. 부식도 잘 나왔고요. 심지어 일주일에 돼지 한 마리씩 줬어요.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보급량이 줄어들어요. 처음에 한 12명이 가서 받아오던 것을 6명이 지고 오고, 나중에는 한 세 명이 일주일치 물자 가져오고, 나중에는 한 명이 지고 와요. 갑자기 왜 이렇게 어려워지지?
이경화: 배급소 앞에 사람들이 이제 그 하얀색 이렇게 자루 같은 거 들고 긴 줄에 대기해서 계속 기다렸던 그 며칠이 기억에 남고요.
마순희: 고난이 행군 딱 시작되면서 모든 게 다 엉망이었죠. 사람 시체를 거적대기 씌워 가지고 산에 가는 모습을 봐야 되고…
소똥에서 옥수수 알을 찾아 먹거나 아니면 죽거나
김은주: 사람들이 그 시기에 정말 많이 굶어 죽어 갔거든요. 저희 아빠도 영양실조로 돌아가셨고, 저는 그 당시에 11살이었는데 사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어요. 하도 많이 봐서 제가 저희 집이 3층이었는데 3층에서 이제 베란다에서 내려다봤을 때 저보다 더 왜소해 보이는 애가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뭘 뒤지고 있는 거예요. 소똥에서 옥수수 알을 찾아 먹더라고요. 사실 북한에서는 진짜 3살, 4살 때부터 장마당에 나와서 자신의 삶을 오로지 스스로 책임지는 아이들이 많아요.
김주찬: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꽃제비 아이들이 많은데, 어느 날 그중 어떤 어린 아이가 한 7살 될 것 같아요. 너무 가엽고 그러니까 어떤 분들이 시장에서 빵을 한 봉다리 사다 그 친구한테 주고 갔는데 그 아이가 그걸 차마 먹지 못한 상태로 숨을 거뒀어요. 너나 할 것 없이 한순간에 누구 한 명 딱 움직이니까 다 같이 뛰어가더라고요. 저도 뛰어갔어요. 저도 그 아이한테서 빵 하나를 겨우 훔쳐가지고 돌아와서 동생과 나눠 먹으면서 ‘아 오늘은 그래도 이걸로 또 생존하겠네’ 하면서 막 먹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엄청난 슬픈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울었어요. ‘아 저 죽은 애가 나였으면 어떡하지? 저 죽은 애가 내 동생이면 어떡하지?’
고난의 행군 시기, 길가에 죽어 있는 시체를 보는 일도, 소똥에서 옥수수를 건져 먹는 일도, 굶어 죽은 아이의 품에서 빵 하나를 훔치는 일도 그저 일상이었던 끔찍한 시절, 그보다 더 끔찍한 건 30년이 지난 지금도 탈북민들에게는 이때의 기억이 선명하고, 또 여전히 칼로 심장을 긋는 듯한 아픔이 선연하다는 겁니다.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는 김정은 시대를 살다 온 Z세대가 기억하는 북한에 대해 들어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