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당대 최고 문장가 월북했더니...

워싱턴-홍알벗 honga@rfa.org
2024.11.09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당대 최고 문장가 월북했더니... '문장강화'로 이름난 월북작가 이태준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가 찾아내 이태준의 증손녀에게 전달했다고 지난 2020년 11월 26일 소식을 전했다. 사진은 당시 46세의 이태준이 1950년 12월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조선 여성 동맹 초대 위원장인 박정애, 헝가리 정부 인사를 담고 있다. 사진은 이태준이 살았던 성북구 성북동의 고택을 카페로 만든 '수연산방'에서 수연산방 대표이자 이태준의 증손녀인 조상명 씨에게 전달됐다. 사진은 수연산방에서 열린 전달식의 초머 대사(오른쪽 세 번째)
/ 연합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한과 북한의 문학세계를 찾아 나서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지금 도명학 작가와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저희가 지금 몇 주째 월북작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혹시 오늘도 월북작가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도명학: 네. 한동안 여러 명의 월북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방송으로 마감할까 합니다.

 

MC: 오늘 소개해 주실 월북작가는 누구인가요?

 

도명학: 네, 이태준 작가입니다. 역시 해방 직후 좌익 활동에 관여하다가 월북했고 북한에서 숙청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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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선 이태준(1940년대 초) 작가 /연합

 

MC: 본격적으로 이태준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제가 궁금한게 있는데요. 우리가 월북작가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까요?

 

도명학: 월북작가를 통해 우리 근대사, 특히 분단 이후 남북 간 이념 대결과 체제경쟁, 그 속에서 살아낸 굴곡진 삶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또 월북작가들이 남긴 작품과 생애는 한국 문학사라는 큰 범주에서 빠뜨릴 수 없는 큰 몫을 차지합니다. 반대로 탈북 작가까지 포함하는 월남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MC: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태준 작가에 대해 알아 볼까요? 선생님, 이태준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도명학: 이태준 작가는 단편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 작가입니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서정성이 짙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 한국 문학 발전에 공적이 큰 작가입니다.

 

이태준 작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군 묘장면이라는 고장에서 출생했습니다. 현재 강원도 철원군은 한국 전쟁 휴전 후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의 고향은 남쪽 철원에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러이사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고향에 철원에 돌아와 철원 봉명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재학 중 동맹휴학이 발생했는데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했습니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치대학에 입학했는데, 이 역시 1년 만에 중퇴하였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을 하면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1933년부터 구인회라는 문인단체 활동에 참여했고, 1939년에는 동인지 “문장‘을 주관했습니다. 1942년에는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8.15 광복 직후인 1945년에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때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다 그해 7~8월 경 월북했습니다. 월북 직후 1946년 10월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한 바 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남하하는 인민군을 따라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월북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1952년부터 사상검토를 받다가 1956년 숙청되었습니다. 이태준 작가의 작품활동은 1925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 창작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쿄 유학을 가면서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작품을 쓰지 않았다가 1929년 “학생”, “신생” 등 잡지 편집에 관여하는 한편 잡지 “어린이”에 수필과 소년독본 같은 글을 썼습니다. “구인회”에 참여해서는 서정성이 짙은 작품 성향을 보였는데, 1934년에 첫 단편소설집 “달밤” 발간을 시작으로, 1937년 “까마귀”, 1939년과 1941년 “이태준 단편집”, 그리고 월북 후 1947년 “해방전후”, 등 단편소설집 7권을 냈고,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 “화관”, “청춘무성”, “사상의 월야” 등 13권과 기행문 “소련 기행”을 발간했습니다. 아 그리고 본명은 이태준이 아니고 이규태인데, 상허라는 아호도 썼습니다. 또 워낙 재능이 특출했기에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인재입니다.

 

MC: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하죠?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이란 말 말입니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된 걸까요?

 

도명학: 제가 단정지어 말하는 건 주제넘은 언행일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는 솔직히 북한에서 이태준, 정지용 두 작가의 작품을 한편도 볼 수 없는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는 이미 그들은 숙청된 지 까마득히 오랜 일이어서 그들의 작품은 금서가 되어 사라져 보고 싶어도 찾아볼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냥 작품은 보지도 못한 채 연세 많은 작가들이 쉬쉬하며 회고하는 얘기를 통해 듣고 정말 대단한 천재들이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이라는 말도 남한에 와서 들었지 북한에선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그런 말을 했다간 숙청된 반동분자를 우상화했다고, 큰일났을 겁니다. 다만 저는 남한에 와서야 그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쓴 작품을 보지 못했으니 참 답답합니다만 남한에서 접할 수 있는 옛날 작품만 봐도 21세기 20년대 중반인 현재도 손색없을 만큼 문장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MC: 어린 시절 고생을 아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는데요. 등단은 어떤 작품을 갖고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도명학: 이태준 작가가 문단에 처음 발을 내디딘 작품은 단편소설 “오몽녀”입니다. 일본 유학을 갔을 때 쓴 소설인데, 당시의 문학지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하면서 데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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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로 이름난 월북작가 이태준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가 찾아내 이태준의 증손녀에게 전달했다고 지난 2020년 11월 26일 소식을 전했다. 사진은 당시 46세의 이태준이 1950년 12월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조선 여성 동맹 초대 위원장인 박정애, 헝가리 정부 인사를 담고 있다. 사진은 이태준이 살았던 성북구 성북동의 고택을 카페로 만든 '수연산방'에서 수연산방 대표이자 이태준의 증손녀인 조상명 씨에게 전달됐다. 사진은 이태준(왼쪽)과 박정애 조선여성동맹 위원장. /연합

 

MC: 그럼 월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도명학: 그가 월북한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물론 북한에서야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김일성장군을 흠모하여 월북했다거나 혹은 혁명대오에 잠입한 우연분자, 기회주의자, 소련에 대한 사대주의자, 이런 식으로 당국의 필요에 따라 누명을 씌우면 그만입니다. 남한에도 그가 월북한 동기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월북했다는 설만 있습니다.

 

MC: 이태준 작가가 결성하고 주도했던 '구인회'는 어떤 단체였나요?

 

도명학: 네, 구인회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들은 바 있는 해방전 문인단체였습니다. 명칭처럼 9명의 문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인회라고 한 것 같은데, 1933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이종명, 김유영의 발기로 이효선, 이무영, 유치진,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정지용 아홉명이 결성했습니다. 이후 얼마 안돼 이종명, 이효석, 김무영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가 보총되어 인원은 여전히 아홉명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간 증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정지용 시인이 북한에 간 것은 알려진 사실인데 남한에서는 그 후 행적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더군요. 정지용은 한국 전쟁 때 인민군이 후퇴할 때 압록강 연안 자강도, 그러니까 당시는 평안북도인데 그곳 만포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사망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지용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정구인입니다. 양강도 풍서군에 어렸을 때 추방되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농부로 살았는데 이름을 아버지 정지용이 정구인으로 지은 것을 보면 구인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랬을까 싶었습니다. 조선의 대문호의 아들이 산간오지에서 농부로 묻힌 것은 구인회를 북한에서 좋지 않게 평가합니다. 카프와 달리 계급투쟁 정신이 결여되고 일제에 굴복한 문인들의 기회주의 단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지용의 아들 정구인은 연좌제로 인한 희생물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처음 알았을 때 속에서 화가 울컥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았습니다. 양강도 풍서군, 그곳에 한설야 가족도 그렇게 쫓겨와 살았고, 아무튼 그래선지 그 산간 오지에서 특출한 문학 인재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곤 했습니다. 현재 북한 문단의 중견 중의 중견인 시인 장혜명 시인도 그곳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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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이태준 작가도 사망일을 모른다고 하는데 당시 이태준 작가의 주변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건가요?

 

도명학: 1956년에 숙청된 것을 보면, 북한에서는 그것을 56년 종파 사건이라고 합니다. 당시 남로당파, 소련파들이 숙청되었는데, 제 생각엔 이태준 작가는 두가지 다 해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왜냐면 어려서 소련에서 생활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본인이 소련을 방문하고 소련기행문을 발간했을 정도니 당시 북한 당과 정권 내에 포진해 있던 소련파들과도 통했을 것이고 또 남쪽 출신이니 박헌영 등

남로당파들과도 통하는 데다 수령 우상화 작품을 쓰는 것을 대놓고 싫어했으니 어떻게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 뻔합니다.

 

MC: 이태준 작가의 작품세계 또는 그의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도명학: 이태준 작가의 작품은 광복 이전에는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성향을 띠기보다는 예술지상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간 심리의 섬세한 묘사나 동적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작품에 사회주의적 색책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인민군 종군작가로 참여하면서 쓴 작품 “고향길”이란 ‘첫 전투“ 등은 정치 사상성을 생경하게 드러냄으로써 해방전 작품보다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준 작가가 내면에 간직한 창작 철학은 인간 본연의 감정과 윤리 등 보편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MC: 마지막으로 이태준 작가의 대표작 하나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명학: 시간상 상세한 소개는 안 될 것 같은 데, 이태준 작가의 첫 데뷔작 “오몽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이 단편소설은 함경북도 사투리 때문에 다소 난해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한다면 소설에서 눈먼 40대 남자 점쟁이 참봉에게 맹인견 격으로 팔려온 스무살 오몽녀가 등장합니다. 사실 형식상 부부로 둘 사이 애정이 뜨거울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마지못해 살아가던 오몽녀,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여성 오몽녀는 결국 주변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더니 결국 젊은 남자와 함께 야반도주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명의 오몽녀의 주변 남자인 어떤 순사가 참봉을 살인하고 자살로 사건을 위장합니다. 결국 소설에서 오몽녀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약자로서 살아가는 방도를 나름대로 찾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또 한사람의 가까운 사람들은 피해 입고 목숨까지도 억울하게 잃습니다. 돈에 팔린 젊은 여성 오몽녀의 처지도 불쌍하고, 그 때문에 살해 당한 남편 참봉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해 무척이나 아리송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MC: 이젠 끝내야 할 시간입니다.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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