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숙청된 월북 정치만담가 신불출
2024.10.19
MC: 서울의 탈북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한과 북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도명학 작가와 전화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 볼까요?
도명학: 네, 오늘은 만담가 신불출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힙니다.
MC: 이름이 참 독특한데요. 본명인가요?
도명학: 아닙니다. 본명은 신흥식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으나 남한 측 기록에는 신영일로 되어 있고, 북한 측 기록에는 신상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신불출이라는 이름이 어감상 팔불출이라는 말처럼 느껴지며 웃었는데. 신불출이라는 이름은 신불출 본인이 직접 지은 예명으로, 억압받고 혼란스러웠던 일제시대를 살면서 차라리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에서 한자로 아니 불, 날 출자를 본인의 성씨 뒤에 붙여 신불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MC: 어떤 인물이었는지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네, 월북 작가 신불출은 작가인 동시에 만담가로 유명한데.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언어유희적인 만담에 대단히 능했으며 당대의 유명 연예인이었지만 어린 시절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신불출은 1925년 연극계에 등장한 이래 193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세태를 풍자하고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해학적인 만담과 연극을 공연하여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 비판 만담으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으며,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될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 노하라"로 발음되도록 일본식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MC: 그런데 어떻게 만담가가 되었나요?
도명학: 본래 연극 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던 신불출이 만담가가 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신불출은 1931년에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사를 바꾸어 다음과 같이 외쳤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일이 있습니다.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 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 후 신불출은 표현의 자유가 크게 억눌리던 일제 강점기 하에서 풍성한 해학과 풍자를 담은 정치적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그중 1933년에 발매된 “익살맞은 대머리”라는 제목의 만담 음반은 대성공을 기록하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전시 체제가 강화되어 독자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신불출의 만담은 예리한 언어 감각과 날카로운 풍자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MC: 공부도 많이 한 엘리트라고 들었습니다만.
도명학: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변이 좋았고, 암송하는 시가 수백 편이어서 한번 흥이 나면 쉴새없이 동서양의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매우 깔끔한데, 만담가보다는 오히려 학자풍에 가깝습니다. 신불출이 만담가로 활동을 시작하던 1920년대 후반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극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기도 하고 대본도 썼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만담가로 변신해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이었습니다.
신불출은 일제 강점기 때 만담에 시국 관련 발언을 섞어서 하곤 했습니다. 그가 한복 차림에 게다짝을 신고 무대에 올라와 만담을 한 일화가 유명한데, 당시의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을 비꼬는 만담을 하기 위한 차림이었다고 합니다.
MC: 특별히 선생님께서 신불출 작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도명학: 우선 그가 월북작가이고 일제강점기와 분단 이후 남북한 모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신불출의 운명과 생애는 한반도가 겪은 수난과 이념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진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신불출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봅니다.
MC: 신불출 작가는 남한에서도 꽤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한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어땠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가 월북한 이유는 뭔가요?
도명학: 네, 신불출은 광복 후 남한에서 미군정 시기 작품 활동과 만담을 통해 대중에게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사상적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고, 조선영화동맹 간부로, 남조선노동당 간부로 좌익 활동에 참가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는 그의 만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뛰어난 예술 재능에 대한 평가와 동시에 남로당 활동을 하다 월북한 것으로 인해 좋지 않은 평가가 혼재합니다.
신불출은 1946년에 열린 6.10 만세 운동 20주년 행사에서 태극기에 빗대어 미군정 체제를 풍자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 우익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 소속 김두한과 부하들에게 총격으로 왼쪽 어깨와 팔과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우익 단체 사람들은 중상을 입고 도망가다 과다 출혈로 쓰러진 신불출을 쫓아가 죽이려고 했으나 목격자들 때문에 죽이지 못해 놓쳤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 과정에 신불출은 치안 교란, 연합국 비방 등의 죄목으로 미군정에 구속되어 벌금 2만원과 징역 1년을 선고받게 되고, 복역 후 1947년에 월북했습니다.
MC: 북한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요? 북한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어땠습니까?
도명학: 월북 후 신불출은 38선 이북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내며 공훈배우로 선출되고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가 있고 6.25 한국 전쟁 때는 선무방송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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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불출은 대본을 검열하는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유로운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게 되고, 이어 그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게 되는데. 결국 1960년대 한설야 계열이 몰락할 때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숙청 이후로는 지방의 노동교화소나 협동 농장, 정치범 수용소로 추방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1976년경에 사망했다는 소문만 있을 뿐, 사망한 시기도 분명치 않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신불출과 함께 수감 되었던 탈북자 김영순의 증언에 의하면, 말년의 신불출은 수용소 내에서 병마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그만의 특유한 유머를 보이며 수감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김정일도 신불출의 유머를 좋아하여 사후 그의 만담집을 출간하도록 했는데, 다만 한설야, 최승희, 심영 등 비슷한 시기에 숙청당한 월북작가 예술인들이 복권된 소식 중에 신불출이 복권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해 모르겠습니다.
MC: 신불출 작가의 작품세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작가 또는 작품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도명학: 신불출의 작품은 해학과 유머, 재치가 넘치는 것이 특징이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적 울분과 반항심이, 광복 후와 월북 후에는 이념적 정치적 선전이 웃음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순수문학과 거리가 있는데, 다만 그것이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지닌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창작 공연된 그의 만담들은 미군이나 남한 위정자, 지주, 자본가들을 풍자 조롱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이룹니다.
MC: 신불출 작가가 북한 또는 남한 문학에 끼친 영향이라고 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도명학: 신불출은 남과 북 모두에 웃음과 해학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느끼게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만담은 민중적이고 통속적이고 심지어 천박하기까지 한 막말들까지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경지에 결코 밉거나 듣기 싫지 않은 소리로 등장시켜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몸짓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만담, 재담, 희극 같은 장르만이 아니라 문학의 모든 장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을 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북한에 준 영향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한에는 현재 만담이 거의 사라진 것 같으나 북한에는 만담과 재담이 대중예술 장르가 되어 있을 만큼 신불출이 뿌려놓은 영향이 남아 있고, 그로 인해 북한 당국은 상당한 정치선전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MC: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됐는데요. 끝으로 신불출 작가가 남한과 북한의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해주시죠.
도명학: 네, 그 메시지는 신불출이 광복 후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할 때 있었던 일화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불출은 가끔 돌발적인 즉석 만담으로 인해 한때 서울 시내 극장에 출연을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태극기 사건인데, 1947년 초 여름날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는 중앙극장에서 열린 시국 강연 휴식 시간 신불출이 등장하여 태극기에 대하여 해괴망측한 그의 특유한 화술로 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태극기 상단에는 붉은 색이고 하단에는 푸른 색인데 태극기가 세월이가면서 비바람을 맞으면 상단에 붉은색이 빗물에 젖어서 붉게 흘러내리면 하단에 푸른색은 자연스럽게 붉은색으로 변한다면서 태극기가 자연스럽게 붉은색으로 변하듯 남한도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역설했습니다. 이 말에 관객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하여 저놈 잡아 죽이라고 소리 지르며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신불출은 잽싸게 무대 뒤로 도망을 쳤고 그 후로불출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다시는 극장가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신불출은 그 당시 공산주의를 상당히 신뢰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공산주의가 이 민족, 이 나라를 잘사는 나라로 만들 것이라 믿고 천방지축 뛰어다녔지만 결말은 숙청이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고, 월북하지 않았더라면 신불출 운명은 비참한 결말로 끝나진 않았을 것입니다.
MC: 네, 오늘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 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