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남북 모두에게 사랑받을 김동리와 박목월
2024.12.21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남한과 북한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보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남한의 문학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 나오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오늘은 어떤 작가의 문학관을 가 볼까요?
도명학: 네, 한국의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 인생을 기념하는 동리목월문학관입니다. 두명의 작가를 동시에 기념하는 문학관은 제가 알기론 동리목월 문학관 외 없는 것 같습니다.
MC: 먼저 김동리, 박목월 두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먼저 김동리 작가를 소개하면 김동리 작가는 대한민국 소설의 거장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1913년 12월 21일 경상북도 경주군 부내면 성건리, 현 경주시 성건동에서 아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본명은 김시종입니다. 이 본명과 동리라는 이름은 큰형인 김범부가 지어주었는데 김범부는 대한민국의 철학자, 정치인, 군인, 언론인으로 활동한 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김동리가 형 김범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며 김동리의 소설 “화랑의 후예”에 나오는 숙부의 모델도 김범부라고 합니다. 소설 “화랑의 후예”는 1935년 “중앙일보”에 발표된 작품으로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몰락한 양반을 통해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표현한 작품이며, 김동리의 대표작입니다.
김동리 작가는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등단하였습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며 소설가로도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김동리 작가는 1937년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 부락' 동인으로 활동했고, 1941년 절필하기까지 21편의 글을 쓰고 세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길어지면서 일제의 압력이 피부로 느껴질 때가 되자 절필합니다. 절필한 뒤로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사천의 양곡배급소에서 일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화 등이 ‘조선문학건설본부’ 등을 조직하고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하자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에 별도로 서정주 시인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며 좌익계열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이때 그는 소설집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을 출간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져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도하게 되자 과거 토속성과 외래문화의 대립에 따른 인간성을 그리던 작품에서 이동하여 인간과 이념의 갈등을 주로 다룬 작품을 썼습니다. 이 시기 작품으로는 “귀환장정”, “실존무”,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 등이 있습니다.
김동리 작가는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3년 중앙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1년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3부터 1989년까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또 한 번 역임했습니다.
김동리 작가는 1990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1995년 6월 17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향년 81세로 별세했습니다.
박목월 시인도 대단한 인물인데, 1915년 1월 경상남도 고성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곧이어 경상북도 월성군, 현 경주시 서면 건천리 모량마을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1929년 건천공립보통학교, 1935년 대구 계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경주군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했다가 일본에 갔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교직에 종사하며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를 비롯해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 등에 출강했습니다. 1956년에는 홍익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가 이후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1959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영전하여 1978년 3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부교수, 교수, 문리과대학 학장서리 및 학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처음에는 동시로 출발했으며 1933년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특선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39년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습니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청록파를 결성하고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청록집에 실린 그의 시로는 “임”,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 등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시는 민족적인 서정과 간결하고도 리듬감 있는 시어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기타 유명한 시로는 ‘하관’, '내 신발은 십구문 반'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가정> 등이 있습니다. 또 군가인 <전우>, 포스코 사가, 한국일보 사가, MBC 사가, 문창고등학교와 신정고등학교 교가 등의 작사도 했습니다. 시 <가정>은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었습니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호인이었다고 하는데, 다정다감하고 목소리는 약간 가냘픈 듯하며, 조용조용한 성품에 원고 청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고, 모든 원고는 꼬박꼬박 본인이 직접 가져다 주었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일제강점기에는 농촌 풍경의 목가적 정서를 노래했고 이승만 정권 때는 대통령 예우곡을 작사했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육영수 여사의 시 선생 역할을 하면서 육영수 전기를 지었습니다.
시인은 1978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63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MC: 김동리 작가와 박목월 시인은 주로 어떤 작품을 썼으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도명학: 김동리 작가는 주로 순수문학을 창작하였고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3개의 성향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민족의 삶과 정서를 다룬 “역마”, “무녀도” 등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을 다룬 리얼리즘 성향의 작품으로써 “까치소리”, “혈거부족”, “광풍 속에서” 등이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예술'에 관련된 것으로 그는 이를 장편으로 시도했으나, 문학적인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초기 시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쓴 느낌이 강해 시의 분위기가 평소 박목월 시인의 이미지와 잘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아름답게 표현한 서정시, 하면 박목월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시들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이러한 시들로 인해 “북쪽에 김소월이 있다면 남쪽에는 박목월이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시의 소재나 분위기가 바뀌는데, 초기 시는 자연을 소재로 했다면 후기 시들은 일상적인 삶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 속의 아픔을 넓은 관점에서 사회적인 소재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박목월 시인은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단단한 자아를 표현한 시인이라고도 평가받습니다.
MC: 두 작가의 대표작이자 가장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도명학: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소설가인 김동리의 대표작으로는 “화랑의 후예”, “무녀도”, “역마”,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 “까치소리” 등인데, 그중 “화랑의 후예”를 소개한다면. 이 작품은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소설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나’는 숙부인 완장 선생의 소개로 가문에 자부심ㅇ 강한 조선 양반 황진사를 만납니다. 그런데 황은 자신이 화랑의 후예라는 등 조상을 들먹이며 허세나 부리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인물입니다. 그러다 황진사는 급기야 약장수 패거리에 끼어 효험이 증명되지 않은 약 선전을 하던 중 경찰서에 끌려가게 됩니다. 소설 속 황진사는 현실적 궁핍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욕구 속에서 비굴함과 오만함을 오가는 복잡한 성격의 인물로 구시대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버리지 못하고 비현실적으로 방황하는 전형적인 인간상입니다. 김동리 작가는 이러한 인물을 통해 시대를 직시하지 못하고 낡은 관념속에서 방황하는 일제 강점기의 몰락한 양반 계층의 오만과 허위성을 폭로합니다.
박목월 시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시들도 다수인데 그중에서도 시 '청노루'의 경우 많이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청노루의 전문은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렇게 되어 있는 데, 짧으면서도 강렬한 서정을 담아냈습니다. 즉, 청노루에서 나오는 '청'은 자연친화적이며 순수하고 고결한
생명의 상징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박목월 시인이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정서적인 안식처가 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죠.
시 청노루에는 특이한 특징이 있는데. 주로 정적인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를 조화롭게 사용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를 통해 운율의 변화를 주었으며 시선의 이동을 통하여 대상들을 묘사하고 표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조사를 생략하는 특징이 있어 여백의 미를 두어 그 울림을 더 깊게 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나오는 자하산도 보라색 빛을 띠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는 가상의 세계로 유토피아 즉, 이상향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노루는 자연의 모습을 상징화 한 모습으로 자연의 깨끗함, 맑음, 순수함 등을 담고 있습니다. 푸른색의 청운사, 청노루, 보라빛 산 등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들이죠. 이는 이상화된 공간 속에서 탈속적인 세계를 표현하였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 ‘청노루’는 자유시이자 서정시로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박목월 시인의 시 느낌을 고스란히 잘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이제 문학관 이야기를 해 볼까요? 동리목월 문학관은 어디에, 어떻게 조성돼 있나요?
도명학: 동리목월문학관은 경북 경주 지역 출신인 김동리 소설가와 박목월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6년 설립되었습니다. 문학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기 위해 토함산 자락에 건립된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운영과 동리목월 문학상 제정·운영, 문학 심포지엄, 시 낭송의 밤 행사, 전국 백일장, 동리목월 가족백일장, 문학심포지엄 등 두 선생의 뜻을 따라 문학 교육사업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2층에는 동리 문학관과 목월 문학관이 구분 되어 있으며 두 문인의 집필 흔적을 볼 수 있도록 서재를 재현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집필 도구와 각종 문서, 출판 도서물을 볼 수 있으며 어린이 관객의 쉬운 이해를 위해 소설 내용을 제작한 영상물과 육성으로 녹음 된 시 낭송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경주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기억하고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며, 창작과 실험적 문화의 장을 만들어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고 발굴하는 곳이 동리목월문학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 김동리 작가나 박목월 시인의 작품들이 북한에서도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요?
도명학: 네 , 주 작가 모두 보편적인 인간상을, 특히 박목월 시인 같은 경우 남과 북을 떠나서 보편적인 그 서정성을 자연과 함께 아주 잘 썼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소월의 시도 잘 읽히는데 그거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MC: 남한에서 문학관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문학관 시리즈. 오늘은 동리목월문학관과 김동리 작가와 박목월 시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김진국,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