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북한 문단서 삭제된 ‘월남작가 김동명’
2025.01.18
MC: 서울의 탈북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한과 북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도명학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오늘은 어느 월남작가를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도명학: 네, 이미 돌아가시진 오랜 분인데 북한에서 월남한 김동명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MC: 김동명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좀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김동명 작가는 시인인 동시에 수필가였고, 정치평론가, 시사평론가, 대학 교수였으며 제도권 정치에도 참여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본명은 김동오이고, 1900년 2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외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1908년에는 부모님을 따라 현재의 북한 강원도 원산으로 이사하였고 1913년에 다시 함경남도 흥남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작가는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흥남 지역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뒤 1922년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시로 문단에 등장하였습니다. 아후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 전문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냈고 1936년에는 두 번째 시집 “파초”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이 남달리 높았던 김동명 작가는 일제에 항거하여 1942년 시 “술노래”를 끝으로 해방될 때까지 붓을 꺾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민족시인이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1947년에는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거의 시풍과 서정성에서 벗어나 현실과 정치, 사회적인 풍자와 관념에 관한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월남 직후 1947년에 세 번째 시집 “하늘”을 발간하고 1948년 이름을 김동명에서 김동오로 개명하였으나 여전히 김동명이라는 개명 이전 이름을 계속 필명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55년에는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55년 “적과 동지”라는 평론을 신문에 통하여 연재하며 예리한 정치 평론 활동을 하였습니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 군사혁명 전까지 정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1968년 1월 21일, 3년간 지병으로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인하여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유해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출생한 곳인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로 유해가 이장되었고, 그의 생가터에는 2013년 김동명 문학관이 건립되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MC: 일제강점기와 2차 세계대전, 해방, 그리고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때 그때마다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써 온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도명학: 앞에서 조금 이야기했지만 김동명 작가는 순수 문학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정세 변화에 따른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민족애와 애국심이 높은 작가였습니다. 그랬기에 때에 따라선 절필도 하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고 정치권에도 직접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작품도 “삼팔선”, “진주만”, “적과 동지” 등 사회정치적 문제가 짙게 담긴 작품들을 많이 쓴 것만 봐도 시대정신이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의 삶 자체가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MC: 김동명 작가가 월남하게 된 계기, 동기는 뭔가요?

도명학: 김동명 작가는 8.15 광복 후 북한에서 흥남중학교 교장을 했는데, 당시 발생한 1946년에 발생한 “흥남학생의거사건”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고 나서 월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남학생의거 사건은 함흥학생반공의거 사건, 또는 함흥반소의거사건으로도 불리는 사건인데, 남북한 모두에 신의주에서 일어났던 반공학생 의거 사건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것에 비해 함흥학생의거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를 좀 비켜가는 감은 있으나 말이 나온 김에 이 사건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특히 외부 정보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는 북한 동포들이 알아야 할 사건입니다.
함흥 학생 반공 의거 또는 함흥 학생 반소 의거는 1946년 3월 11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학생들이 반공,반소 의거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1945년 8월 소련군에 의하여 북한에 소련군정이 실시되면서 각 도의 도청은 소련군의 군정청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46년 초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도인민위원회가 들어설 도청은 이미 소련군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남중학교 교사를 청사로 차지하였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모교사수를 외치며 이에 항거하였습니다. 한편, 이 무렵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큰 공장의 기계가 어디론지 뜯겨가고, 식량 배급이 끊기면서 시민들의 불평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3월 11일 마침내 함흥공업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 ‘우리의 쌀은 어디로 갔는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고. 이에 호응한 600여 명의 함흥농업학교 학생들도 거리로 뛰어나와 합세하였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인민위원회는 긴급대책으로 3월 20일 예정이던 학년말 방학을 3월 13일로 앞당겨 실시하도록 각 학교에 시달하였습니다. 그러자 각 학교 학생대표들은 비밀회합을 가진 다음, 이튿날 방학식이 끝나자 함흥의전 ·함흥중학교 ·함흥농업학교 ·함흥공업학교 ·영생고등여교·실과여학교·함흥고등여고 등 약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였습니다. 시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약 1만 5,0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결국은 보안서와 소련군이 동원되어 일대 격돌이 일어났는데, 보안서의 실탄 발포로 학생 1명, 시민 2명의 희생자가 나고, 보안서원 3명이 사망하였으며, 학생 ·시민 ·보안서원 1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사건진압 후 많은 학생 ·시민이 검거되었는데 바로 여기에 김동명 작가도 속해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감옥에서 풀려났어도 북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월남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MC: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겁니다만, 북한에서도 김동명 작가가 알려져 있나요?
도명학: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월남했으면 반동작가인데 당국이 알려 줄리 없습니다. 북한 체제에 충성심이 높고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나중에 문제가 제기돼 숙청되면 당사자가 쓴 글과 사진까지 삭제하는 것이 북한입니다.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망명했을 때도 당국이 모든 직장과 가정들에서 황장엽 얼굴이 있는 기념사진들과 황장엽 명의의 표창장들을 모두 거둬들여 표창장 같은 건 없애버리고 황장엽 얼굴이 보이는 기념사진들은 김일성 얼굴도 있어 없애지는 못하고 황장엽 얼굴만 넓은 이마에 머리숱이 내려 덮인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 돌려주었습니다. 다만 월남 작가들이 시중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가문서고와, 보위기관, 안전기관 등이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것입니다.
MC: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김동명 시인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도명학: 저는 김동명 시인의 시들이 서정성이 매우 짙을 뿐 아니라 그 속 사회상, 시대상, 고상한 이상을 내포한 의미가 깊이 녹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예컨대 자연을 시재로 한 시를 쓸 때 나타나기 쉬운 점이 자칫 자연주의적인 작품이 되거나 순수예술적 취향에 그치는 경우가 보통인데 김동명 시인의 시는 그런 점을 초월한 시들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의미가 깊은 시를 재치 있게 써낸 시인이 김동명 시인입니다.
MC: 그의 작품 가운데 감동을 줬던 것이나 시 구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도명학: 시인이 작고한 지 오래기에 가장 많이 알려진 몇몇 대표시들 외에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원도 강릉에 설립된 김동명 문학관에 전시된 시집들도 한자가 많이 섞이고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표현들도 있어 신세대들 읽기에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감동 받은 시들은 “파초”, “수선화”, “내 마음은” 등이었는데 그야말로 서정시의 백미를 이루는 시들이었습니다.
MC: 북한주민들도 함께 읽으면 좋을 만한 작품 하나를 소개해 주세요.
도명학: 저는 북한 주민들에게 시 “삼팔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만 사실 저도 찾다 못해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를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이 시에 시인이 북한에서 겪은 고초가 담겨 있다고 해서였습니다. 앞으로 계속 찾아볼 생각인데 시인의 다른 시들로 봐선 분명 잘 된 작품일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더구나 본인이 직접 겪은 체험을 시에 담은 만큼 어느 시보다 북한 주민들이 공감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 “삼팔선”을 찾지 못해 아쉽지만 대신 또 다른 대표작 시 “파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MC: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도명학: 시 “파초”는 파초라는 남방 식물을 의인화 하여 나라를 빼앗긴 한과 광복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서정시로 짙은 서정과 시대적 사명감을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사랑받기 충분한 시입니다. 사용된 시어들을 간단히 해석한다면, 시에서 시적 화자가 파초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표현은 해방을 위한 종이 되겠다는 의미고, 겨울은 일제강점기를 의미하며, 가리운다는 표현은 해방의 상징인 파초를 통해 해방을 이루어내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MC: 네, 오늘 순서는 여기까집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