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딸 그린 시 때문에 숙청된 월북작가
2024.11.02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떠나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도명학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도명학: 카프 출신 월북작가 임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MC: 임화 작가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도명학: 임화 작가는 시인이면서 평론가였고, 동시에 배우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서울 동숭동에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유년기 그의 가정은 파산상태에 있었고, 19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 충격으로 거리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해 연극에 대한 평론을 쓰며 연극에 관심을 보이고 카프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평론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7년 경부터 계급문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29년에 시 “오빠의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 잡으며 카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1935년 5월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한 후에는 잠시 순수문학으로 전환하는 듯했으나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과 가까워지면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임화작가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아내인 지하련은 소설가였습니다. 임화, 지하련 부부는 해방 후 1947년 11월 박헌영을 따라 월북하였습니다. 1948년 4월 당시 개최된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해(1948년) 8월 2일, 잠시 북괴 황해도 해주로 건너가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평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48년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동참하였습니다.
임화 작가는 1950년 6. 25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을 때 서울에 와서 딸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북한군이 후퇴하게 되자 다시 북한 자강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때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라는 시를 써 딸을 찾지 못한 자신의 비애를 달랬는데, 이 시가 서정성이 짙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으로 쓴 것이 북한군 전사자들을 모욕하고 염전 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숙청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53년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로당 계열이 숙청 당할 때 임화 작가도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행위로 혐의로 기소당했고, 일제에 아첨했고 반소 반공 행위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남편 임화의 불행을 전해들은 아내 지하련은 피난 갔던 중국 동북 지방을 떠나 급히 평양으로 돌아와 울고불며 남편의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운명을 산 인물이 임화 작가였습니다.
MC: 본격적으로 임화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작가들은 '필명'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필명이란 무엇이고 또 작가들이 이 필명을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요?
도명학: 네.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임화 작가도 본명은 임인식인데 필명으로 임화 외에도 쌍수대인, 성아, 청로, 양남수,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부터 사용했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별로 없는데 남한 작가들은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저도 남한에 와서 정필이라는 필명을 잠간 사용하다가 그만뒀습니다. 필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거기에 자신의 꿈과 비전 혹은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나 취향 같은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고, 신변이 위험하거나 비공개 활동이 필요한 경우에도 사용하게 됩니다.
MC: 듣기로는 이 임화 작가가 상당한 미남이었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였나요?
도명학: 네, 저는 북한에서 그를 직접 본 적은 없는 세대였지만 노작가들에게 들었습니다. 임화 작가는 “연애 박사”,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로 불렸을 만큼 얼굴 피부가 희고 몸매가 훤칠한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로도 활동한 것 같습니다.
MC: 그런데 임화 작가의 말년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어떻게 된 일이었나요?
도명학: 임화 작가는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된 간첩으로 기소되었는데, 사실 이 부분이 신빙성 없는 것은 작가, 영화배우에 불과한 그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은 좀 뜬금없는 얘기 같더라는 것이 당시 북한 작가들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재판이 그렇게 된 이상 거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당시 북한 문단의 최고 권력자였던 한설야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숙청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MC: 딸을 생각하며 쓴 시 때문에 숙청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어떻게 될 일인가요?
도명학: 딸을 생각하며 한국전쟁 중에 쓴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문제 시 됐습니다. 북한당국은 이 시가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숙청의 빌미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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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임화 작가는 서울 출신이던데요. 월북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도명학: 박헌영을 알게 된 것이 시발점이었습니다. 임화 작가는 박헌영을 마치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헌영에 추종해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의 처벌을 피해 박헌영을 따라 38도선을 넘어갔고, 또 그의 내면엔 모스크바 유학의 꿈이 불타고 있었고 계급문학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완전하게 실현한다는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MC: 북한에서는 활발히 활동을 이뤄나갔나요?
도명학: 임화 작가가 북한에 있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많이 남긴 것 같진 않습니다. 대개 6.25 전쟁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인데 앞에서 언급한 염전 사상이 짙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 외에도 “인민항쟁가” 등 북한군과 남한 내 좌익세력을 크게 고무 격려하는 격조높은 작품들도 있습니다. 창작활동 외에도 임화 작가는 조소출판사 사장과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출판사 편집 교정을 보거나 대남 선전선동용 문건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MC: 임화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어떤 게 있나요?
도명학: 시 “우리 오빠와 화로” · “네거리의 순이” · “어머니” · “병감에서 죽은 녀석” ·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가 그를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한 작품들인만큼 대표작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1938년에 발간된 “현해탄” · 1947년에 발간된 “찬가” · 1947년에 발간된 “회상시집” 그리고 월북 후 6.25 전쟁 시기 발간된 ·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등이 있습니다,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 가 있고,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이 있습니다.
임화 작가는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MC: 임화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 좀 해주시죠.
도명학: 임화의 시는 상당이 격정적이고 낭만적인, 시대의 한 가운데서 활동한 지식인의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 준다는 평을 받습니다. 임화 작가는 문학 활동을 시작한 처음에는 다다이즘 작품 성향을 보이다가 곧 카프에 가입하면서부터는 무산계급 해방을 갈구하는 작품들을 썼습니다. 다른 카프 출신 작가들이 쓴 시와 차별되는 점은 다른 카프 출신 작가들의 시가 선동적인 언사에 가려져 서정성이 다소 결여된 것에 비해 임화의 시는 서정성이 뛰어난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점이 숙청의 빌미가 되었던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같은 시를 쓰다 화를 당했을 것 같습니다.
MC: 우리가 임화 작가의 삶에서 또는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도명학: 만약 임화 작가가 사회주의 사상에 현혹되지 않았더라면, 또 월북하지 않았다면 그의 뛰어난 재능과 잘생긴 외모 등으로 봐서 한국 문학사의 큰 별로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물론 임화 작가에게 흠결은 있습니다. 비록 소극적이라곤 하나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보를 보였고, 그럼에도 친일 청산을 앞장서서 부르짖었고, 지나치게 정치에 깊이 개입해, 하필이면 김일성에게 패배한 박헌영에게 줄을 선 실책, 뒤늦게 살아남으려고 부랴부랴 비굴하게 김일성에 아첨하는 글을 썼지만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낭만에 취해 정치의 비정함도 모르고 불길에 뛰어든 부나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가도 정치에 관심 가질 수 있고 직접 참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이념에 현혹돼 함몰될 때 정치적, 육체적 생명뿐 아니라 문인으로의 삶도 비참해진다는 교훈을 월북작가 임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임화뿐 아니라 월북작가 대부분의 운명이 그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MC: 네, 오늘 임화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도명학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