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과 북한의 반제반봉건운동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1/12/01 10:00:21.150589 US/Eas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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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과 북한의 반제반봉건운동 지난 2015년 평양에서 미 제국주의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P

북한 동포 여러분, 지난시간에 1894년에 있었던 갑오개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갑오개혁에 대해 더 잘 이해하자면 같은 해 갑오개혁이 있기 전에 벌어졌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19세기 이조왕조 시기에 있었던 반제반봉건운동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을 소개하고 20세기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해 제시되었던 반제반봉건운동의 허위성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이조왕조 말기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제반봉건 운동입니다. 동학운동은 고부(백산) 봉기라고 불리는 1894년 3월에 있었던 제1차 동학농민운동과 전주와 광주일대에서 그해 9월에 있었던 제2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나뉩니다. 동학운동의 이념인 동학사상, 일명 천도교 사상은 철종 시기인 1860년에 동학교의 사상가인 최제우가 내세운 우리민족 고유의 경천사상(敬天思想)을 바탕으로 그 위에 유교와 불교 등 여러 교리들을 혼합하여 만든 민족종교 사상입니다.

동학에서는 사람은 곧 하늘과 같고,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으며,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도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신분제도에 대한 강한 반발을 예고하는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노예제 폐지와 신분제 철폐가 시작되었고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되고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설립되면서 신분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그러면 과연 동학농민운동의 발달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봉건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에 맞서 조직적으로 일어나 무장봉기로 맞선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군 대장이었던 전봉준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라북도 정읍시와 부안군 일대에 고부군이라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전봉준 대장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원한을 품은 전봉준은 동학사상을 받들어 낡고 부패한 봉건사회를 뒤집을 큰 뜻을 품게 되죠. 600여 평의 세마지 논에서 농사를 지어 다섯 명 가솔이 근근이 먹고 살아가면서도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봉준은 35세가 되던 1890년경에 동학사상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교했고 얼마 후 동학의 제2세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습니다. 동학에서 지역의 책임자를 ‘접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를 죽인 고부 군수 조병갑의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고 가뭄이 들어 농사가 망쳤는데도 조세를 오히려 3배나 높게 징수하여 백성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백성들에게서 더 빼앗을 벼나 가축 등이 없게 되자 부농들에게도 온갖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1893년 12월 고부군 농민들은 조병갑에게 어려운 형편에 놓인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간청하는 진정서를 올렸습니다. 진정서에는 동학접주였던 전봉준의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진정서를 무시하자 전봉준은 함께 싸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894년 1월 10일에는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궐기해 나섰습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고부군 관공서를 습격하자 고부 군수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쳤고 농민군은 무기고를 들이쳐서 무기를 획득하였습니다. 무장한 농민군은 조병갑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곡식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조봉건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잠재우기 위해 조병갑 등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전라남도 장흥군 부사(府使)였던 이용태(李容泰)를 동학농민군 사건과 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했고 박원명(朴源明)을 새 고부 군수로 임명해 내려보냈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사태를 주시하면서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조봉건 중앙관청에서 농민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처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은 1894년 3월 하순에 인근 지역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전봉준이 호소한 ‘무장포고문’에는 “지금 이 나라의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봉록(俸祿)과 벼슬자리만 탐내면서 아첨만을 일삼고 있으며, 안으로는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을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많으니, 백성들은 집에 들어가도 기쁘게 종사할 생업이 없고 집을 나오면 제 한 몸 보호할 방책이 없건마는 가혹한 정치는 날로 심해져 원망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윤리,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분별은 마침내 다 무너지고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라고 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동학농민군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서 팔도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億兆) 창생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한다”고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삽시에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을 넘었고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손화중(孫和中), 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전봉준 대장을 보좌하게 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무장한 무기라고는 대나무 창이나 농기구밖에 없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하얀 옷을 입은 농민군이 서 있는 곳은 산 전체가 새하얗고, 마치 고슴도치처럼 빼곡하게 바늘이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결국 전라도의 작은 마을인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전라북도 부안에 이어 전주, 정읍, 흥덕, 고창을 점령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 함평, 무안 일대에 진격하였으며 4월 24일에는 장성을 출발하여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삽시에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전국으로 세력을 확대한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겁에 질린 이조봉건정부는 무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도록 했습니다. 농민군의 기세에 눌린 홍계훈은 봉건정부에 외국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농민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청서를 진정했습니다.

홍계훈의 외병차입(外兵借入) 요청을 수락한 이조봉건정부는 중국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인천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봉건왕조와 외세를 반대하여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진압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전라도 순천,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었고 전봉준 대장은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 전라북도 정읍 등지로 피신을 하였다가 전라북도 순창에서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현대판 봉건독재국가인 김씨왕조 북한에는 여전히 신분제도가 존재하고 있어 성분, 토대가 나쁜 사람들은 일생을 가장 비천한 광부, 탄부, 농민으로 살아가야 하며 자녀들에게도 성분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김정은 정권은 이조왕조를 능가하는 반민족, 반인륜집단이며 제2의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에 언제 불이 달릴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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