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왜곡된 ‘광복의 천리길’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3.10.25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왜곡된 ‘광복의 천리길’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 모습.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광복의 천리길에 담겨진 왜곡된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물론, 북한에 사는 사람이라면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혼자 천리를 걸었다는 배움의 천리길광복의 천리길에 대하여서 잘 아실 거라고 봅니다. 먼저 김일성이 배움의 천리길을 걸었다고 하는 1923 3월이면 그가 11살을 1달 앞둔, 10살 나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역 땅에서 어린 아들 3명을 키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생활난을 겪게 되면서 어머니 강반석에게 큰 아들이라도 우리가 맡아 키울 테니 보내라는 얘기가 전달되어 결국 칠골에 사는 친정집에 10살의 어린 김일성을 보낸 것을, 회고록에서는 마치 부모들의 원대한 뜻을 받들어 타향에서 조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바꾼 것이 배움의 천리길이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 1비운이 드리운 나라’ 5압록강의 노래에서 김일성은 ‘1923년 초에 아버지가 자기를 불러 앉히고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라고 말하였고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을 할 수 있으나 조선에서 태어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회고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10살밖에 안되는 자녀를 타향에서 천리길을 걸어서 혼자 떠나보내는 부모가 정말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도 일제강점기면 신변안전이나 치안이 더 어렵고 지금처럼 열차 노선이 김형직군까지 놓여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역사전문가들은 당시 어린 김성주를 팔도구 누이집에 잘 다니던 외삼촌인 강진석이 데려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의원 간판을 걸고 생활하던 김형직에게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마약을 자주 날라다 주던 강진석이 누이와 매형의 부탁을 듣고 어린 조카인 김성주를 칠골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칠골 외갓집에 와서 창덕학교를 다니던 김일성이 12살되던 1925 1월에 또 광복의 천리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광복의 천리길에 대해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4살 때에 조선독립의 원대한 뜻을 품고 칠골에서 양강도 후창군 포평의 맞은편 중국 국경지역인 팔도구에 이르는 천리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궁금한 것은 여기서 왜 김일성은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을 걸었던 나이를 12살과 14살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어린 김일성의 우상화에 맞추어 부풀어 왜곡하자니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단한 수학계산으로도 1925 1월이면 김일성의 나이는 12년에다 9달이 지난 시점이어서 정확히는 1925 4월이 되어야 13살이 되는 것이니까요.

 

회고록에서 김일성은아버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나라 찾는 투쟁에 나설 것을 굳게 마음다지며 1925 1 22일에 만경대를 떠나 북중국경지역의 팔도구에로의 천리길에 오르게 되었다평양에서 개천까지는 열차로, 그 다음부터는 줄곧 생눈길을 헤치며 걸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1977 1월에 광복의 천리길을 걸어봐서 잘 압니다. 가장 추운 겨울철 1월의 자강도와 양강도 날씨가 혹한 추위입니다. 낭림산맥이 있는 구장군이나 자강도 희천 그리고 오가산령을 넘어 포평에 이르는 고산지대의 추위와 생눈길을 당시 12살의 어린 김일성이 혼자서 넘었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북한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통해 강반석이 1920년 김영주를 해산하자 시어머니인 이보익 여사가 만주로 가서 며느리인 강반석을 도와서 어린 손자들인 김성주와 철주, 영주를 키웠다는 것도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김일성의 막내동생인 김영주가 태어난 해인 1920, 1876 5 31일생인 이보익의 나이는 40대 중반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니 김일성이 배움의 천리길을 걸었다거나 광복의 천리길을 걸었을 당시 40대였던 할머니 이보익이 동행했을 거라는 얘기는 또다른 전문가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1920년 김영주가 태어나자 만주로 갔던 이보익이 1923년에 만경대에서 홀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를 도와야 하기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김일성을 데리고 왔고, 1925년 아들인 김형직이 감옥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부를 하고 있던 김일성을 데리고 만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광복의 천리길에 대한 왜곡된 내용은 해방 후 김일성의 수행기자였던, 당시 조선중앙통신 보도국장 한재덕 씨의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해방 전 조선중앙일보, 평양매일신문사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던 그는 해방 후 김일성의 수행기자로 활동하였고 그 이후에는 평양시 문학예술동맹위원장,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서기장, 민주조선사 주필, 조선중앙통신 보도부장을 지내면서, 북한당국에 의해 일본에 밀파되었다가 한국으로 귀순했습니다.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했다던 말 즉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이 문장은 김일성이 회고한 내용에 앞서 한재덕 기자에 의해 먼저 북한 언론에 기사화 되었던 내용입니다.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김일성의 결의를 담은 이 명문장은 김일성이 그대로 자기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썼고 여기에 압록강의 노래 가사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것 역시 한재덕 기자가 직접 창작하듯이 만들어 북한 언론에 기사로 올렸던 것이 지금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교육내용으로, 대를 이어 북한주민들을 세뇌시키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죠.

 

당시 기자였던 그는 김일성의 전기를 위한 취재로 많은 만주지역에서 살았던 주민들을 만났고 그 과정에 김일성의 광복의 천리길이 왜곡된 것임을 밝혀냈습니다. 1월의 엄동설한에 12살의 어린 김일성을 혼자 떠나 보낸 것이라든가, 김형직이 체포되었다가 탈주하였다든가, 그리고 그 과정에 동상을 입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많은 연고자들을 취재하면서 밝혀낸 자료에 따르면 김형직이 1926 6월 만 31살에 죽음을 당하게 된 이유는 북한에서 말하는 일제의 고문이나 동상의 어혈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1971년 이전의 역사자료들을 보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산하단체 회원으로 독실한 민족주의자라고 설명하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김형직을 공산주의자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서 살았던 연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형직은 북한에서 선전하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거나 항일투쟁의 완벽한 선구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1920년대 중반에 남만주일대서도 공산주의운동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구 살인을 당하였습니다. 민족주의자였던 김형직은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약도 팔지 않았고 그러는 김형직을 공산주의자들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황당한 역사왜곡을 죽는 순간까지 하였던 김일성, 그가 남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가장 최악의 역사왜곡도서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정은은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왜곡한 독재자들의 말로는 반드시 준엄한 인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진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더 좋은 세상으로 변할 북한을 그리며 오늘은 여기에서 방송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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