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회고록 속 차광수의 실제인물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3.09.27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회고록 속 차광수의 실제인물 지난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에서 김책, 안길, 최용건, 오중흡, 김일, 김주현, 오백룡, 강건을 비롯한 항일빨치산의 사진을 앞세워 행진의 첫 자리에 선 '항일의 7연대상징종대'
/조선중앙통신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초기 혁명활동 시기 가장 친근한 혁명동지라고 지칭한 차광수의 실제 인물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13길림시절’ 8절 제목이 차광수가 찾은 길입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자신이 차광수를 만나게 된 시점은 1927, 화성의숙에 함께 다녔고 당시 독립군 대원이었던 최창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5살이던 자신이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다가 목이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안경쟁이 청년이 최창걸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청년이 차광수였고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과 차광수가 만났던 당시 차광수의 나이는 22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취자 여러분, 15살 난 김일성이 당시 무슨 강연을 했을 것이며 7살이나 연상인 차광수가 중학교 중퇴생 김일성을 만나서 대화가 통했으리라 생각합니까?

 

차광수의 본명은 차응선입니다. 그는 190545일에 용천에서 태어나 10대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맑스-레닌주의)에 매혹돼 귀국 후 독립군 내 공산주의 사상 조류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림 육문중학교을 중퇴한 어린 김성주와 일본에서 유학했던 차광수와의 만남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고백한 것처럼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 사이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차광수의 태도에 대해 김일성은 그는 몹시 무뚝뚝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차광수가 어린 김성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독립군이었던 최창걸의 소개로 차광수를 만나게 됐다고 하였지만 그것 역시 황당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당시 만주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과 중국 공산당의 자료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김일성과 차광수의 첫 만남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조선혁명군을 창건했던 이종락과 조선공산당 화요파 핵심 멤버였던 김찬에 대해 우선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93362일 자 동아신문에 사진이 실릴 정도로 유명했던 김찬은 차광수보다 11살 연상이었고 김성주보다는 18살이나 나이가 많은 공산주의 활동가였습니다.

 

189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김찬의 부친은 현재의 은덕군인 경원군 군수였기에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졸업 후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김찬은 일본 유학 시절에 차광수를 알게 됩니다.

 

공산주의 서적들을 접하고 일본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었던 김찬은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당시 레닌이 이끄는 볼쉐비크(볼셰비키)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러시아로 건너갔고 그 이후 조선에서 공산당을 창건하는데 깊이 관여했습니다.

 

김찬은 1927 7월 북만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조선인농민조합과 북만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을 주도했고 1928 11월에는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의 지도 간부로 선임됩니다.

 

당시 김찬은 독립운동단체 정의부 산하의 청년 중에서 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읽어 연설을 잘 하는 데다가 인물까지 잘난 차광수를 포섭했고 그리고 김찬의 지시로 독립군 내 간부들을 포섭하던 차광수에게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조선혁명군 창건자인 이종락이었습니다.

 

차광수는 이후 이종락에게 김성주를 소개받았는데 어릴 적부터 중국에서 살아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김성주를 후배로 키울 생각에 접근했을 뿐, 북한에서 혁명역사 시간에 배워주는 내용처럼 차광수가 결코 김일성의 하수인, 충성 분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광수는 김일성에게 처음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입한 인물이라는 것이 역사적 진실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화요파 두령 김찬도 차광수한테 맞다 들기만 하면 쩔쩔매고는 했다김찬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차광수한테는 견디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김성주는 15살 소년 시절부터 차광수를 우러러봤기에 이 능력자가 마치나 자기의 심복이었던 것처럼 왜곡해 자신의 우상화 선전에 이용한 것입니다.

 

200545, 차광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항일혁명투사 차광수 동지(1905-1932) 100회 생일을 기념한 중앙보고회에서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김씨 일가의 우상화 선전에 차광수의 이름을 또다시 써먹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보고회에 당ㆍ정ㆍ군의 지도 간부와 각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보고에서 ‘차광수 동지는 김일성 동지의 비범한 영도의 손길 밑에서 비로소 참된 혁명가의 삶을 찾고 인생 전환의 길에 들어섰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앞에 설명했듯이 김성주와 차광수가 만난 1927년부터 1932년까지 5년 동안의 둘 사이의 관계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청년과 중학생 소년 김성주와의 관계였고 북한이 선전하는 것처럼 김일성의 신변안전을 위해 헌신한 상하, 복종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차광수가 1927년 이후 줄곧 김일성을 보좌하여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 반제청년동맹, 반일인민유격대에 적극 가담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차광수는 독립군 대원으로서 김성주의 부하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위해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세워진 차광수의 반신상 비석에는 그가 1930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하였다고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차광수가 김일성의 부하가 아니라 조선혁명군을 창건했던 이종락의 독립군 대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김일성의 우상 선전을 위해 차광수의 반신상을 세운데 이어 신의주 제1사범대학을 차광수 신의주 제1사범대로 개칭했고 김정일은 모두 다 80년대 김혁, 차광수가 되자!’는 구호를 내세워 북한 주민들을 노예화 하는데 차광수를 이용하였습니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차광수는 김씨 왕조의 영원한 세습을 위한 우상화 선전 대상으로 노골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201912 19일 노동신문 기사 한별, 그이는 조선의 위대한 태양에는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청년공산주의자 차광수와 김일성의 일화를 소개하며 차광수를 어려운 시기, 새 혁명가의 모델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노동신문은 갈길 몰라 방황하던 차광수 동지가 비로소 운명의 닻을 내린 포구가 김일성이었다며 공리공담이 아니라 혁명 실천을 중시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투철한 자주적 입장,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사고방식에 마음이 사로잡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에 대한 차광수의 높은 충성심과 신념을 강조하면서 차광수 동지는 절대적 숭배와 열화같은 흠모심으로 한별이라는 별명을 지은데 이어 김일성의 이름을 한자로 한 일(), 별 성()'이 아닌 날 일(), 이룰 성()'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고 하는가 하면, 김일성의 '신변안전'에 최대의 주의를 기울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왜곡이며 한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다음 시간에 좀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항일혁명열사릉에 있는 차광수의 반신상에는 그가 19307월에 조선혁명군에 입대하였고 19321030일 전사하였다고 새겨 놓았지만 차광수가 김성주에 대해 실망하고 갈라진 시점은 1931년 여름입니다.

 

김성주가 조선혁명군의 무기 20정을 가지고 달아났고 이를 추적하던 독립군 소대장 고동뢰가 김성주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차광수는 김일성에 대해 의리와 양심도 없고 배운 것 없이 사람을 마구 죽이는 무뢰한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둘 사이에는 금이 가게 되어 결국 결별하였다는 것이 당시 가까이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남아있습니다.

 

역사를 왜곡하여 위대한 반일무장투쟁의 선각자들의 업적을 모두 김일성이 한 것처럼 둔갑시켜 우상화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절대로 역사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김정은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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