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서 맨해튼까지] 아이비리그 대학원생 탈북 남매의 뉴욕 생존기
2024.05.29
[기자] 이렇게 있을 때 좀 뉴요커 같으세요?
[이현승] 제가 아직 저를 뉴요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제 평양 뉴요커라고 해야겠네요.
[기자] 미국에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현승] 꿈에도 생각을 못 했죠.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 있었는데 어떻게 갈지 모르니까 막막했었죠.
지난 3월 말,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
[이현승] 여기가 메인 캠퍼스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입구가 양쪽으로 있어서, 암스테르담 대로와 브로드웨이 대로에서 모두 들어올 수 있어요.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학교 건물이 위치해 있는거죠.
탈북민 이현승 씨는 지난해 9월 미국 컬럼비아대 공공정책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현승] 마음 졸이는 것 있잖아요. 온라인으로 (합격 발표를) 열어서 보는데, 축하하는 별이 뜨거든요. 그게 안 뜨면 떨어진 거죠. 근데 별이 뜨고 하니까 기분이 좋았죠. 아 다행이다.
김일성 종합대학교 출신 이서현 씨도 같은 학교에 재학중에 있습니다. 현승 씨의 여동생인데요, 현승 씨보다 1년 먼저 입학해 선배가 됐습니다.
[이서현] 솔직하게 비슷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대학(김일성종합대학)은 그때 당시 제 입장에서는 최고의 대학이었고. 지금은 제가 김일성종합대학 입학 허가증을 받았다고 하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겠죠.
현승 씨와 서현 씨는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 간부 출신인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10년 전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당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1년도 되지 않은 혼란한 시기였는데요.
특히 서현 씨는 중국에서 4년 내내 기숙사를 함께 썼던 북한 친구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눈 앞에서 보위부 요원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주변 인물들이 숙청당하자 언제라도 자신들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중국의 한 공원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했습니다.
도감청을 피하기 위해 차안에 휴대폰과 각종 전자기기를 두고 탈북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이서현] 일단 탈북을 하는 과정 동안은 정신이 없고, 꿈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실제로 이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저희도 믿기 어려운. 그때는 너무 긴장이 됐죠. 어느 순간 누가 나타나서 누가 덮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북한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TV’는 리정호 씨 가족이 탈북한 2년 뒤인 2016년 리 씨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출연시켜 재입북을 종용했습니다. 사실상 북한 당국의 협박 메시지였습니다.
게다가 북한으로 추정되는 도청과 해킹 공격에 시달리면서 결국 2016년 3월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했습니다.
[이현승] I am North Korean refugee, I am wondering….
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현승씨.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 보입니다.
현승씨와 친구들은 수업이 끝난 뒤 대학 앞 한 맥줏집으로 이동합니다. 현승씨 주위에 친구들이 모여있는데요.
탈북 전 북한 인민군으로 복무했던 그는 한때 적군이었던 이를 절친으로 만드는 기술도 있나 봅니다.
[제임스 브라운] 현승이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한때 저는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있었고 현승이는 DMZ 북쪽에 있었습니다. 같은 기간 서로에 대항해 훈련을 하기도 했을거구요. 재미있죠.
다음 날 저녁 컬럼비아 대학의 한 강당에서 북한 동요가 들립니다. 탈북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교내 시사회가 열린 건데요.
함께 시사회를 준비한 친구와 대화 중인 서현 씨 모습이 보입니다.
서현 씨는 교내 한인 동아리 ‘코리아 포커스’ 친구들과 함께 3달 전부터 이번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상영회가 시작됐지만 서현 씨는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강당 밖 창가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이날은 서현씨가 듣고 있는 수업의 시험 과제 마감일 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까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이 행사를 개최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서현] 이 활동이 학생으로서 의무는 아니지만 북한에서 탈출한 학생으로서 이를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행사를 주최한 친구들과 뒷풀이를 위해 맨해튼의 한인타운으로 가는 길.
[이서현] 저도 했는데, 몇개가 제대로 답을 했나? 헷갈려서 확인을 해보려고요.
서현 씨가 택시 안에서 시험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마감 시간 10분 전 제출에 성공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현승 씨가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을 탔습니다. 뉴욕의 명물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선데요, 약 30분 후 맨하탄 남쪽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이현승] 이 배에 타는 분들이 이민자고 여행자이잖아요. 저걸 보면서 아메리칸 드림도 꿀 수 있고 자유를 몸으로 느끼려고 온 것 같아요.
자유를 위해 북한을 떠난 현승 씨에겐 ‘자유의 여신상’이 주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현승] 탈북 후 처음 3년 정도는, 정착도 해야 하고 여러 상황들이 겹치다 보니까 진정한 자유를 느끼기보다는 생활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사회를 접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유의 개념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 수준이 전 세계 최하위라는 북한에서 탈출한 컬럼비아 반전 시위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현승] 한 가지는 부럽기도 하고, 미국이 참 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나라라는 게 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북한이나 중국 같으면 그런 일을 상상할 수가 없죠. 일단은 시작이 되면 진압이 되면 끝이에요. 근데 지금 이 표현의 자유가 자유를 넘어서 다른 학생들에게 지금 불편을 주고 있고 또 건물 점거 등 약간 폭력적으로 시위가 변질이 됐어요.
현승 씨는 한인 마트에 가 미뤄온 장을 보려고 합니다.
[이현승] 학교 주변에 다행히 한국 마트가 있어요.
물가 때문인지 마트에서 과일 하나 고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현승] 물가가 많이 비싸니까 고민이 됩니다. 장을 볼 때 마다. 세일이 지금 이 시간대에 되려나?
지난 2016년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현승씨 가족을 ‘북한 상위 1% 엘리트 계층’으로 소개하며, 평양에 살면서 마치 뉴욕 맨해튼과 같은 삶의 수준을 누렸다며 이들이 사는 세계를 ‘평해튼’이라는 신조어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가족들이 탈북에 대해 결심했을 때 어머니 김부경 씨는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할지가 걱정이었습니다. 그간 최고위층 간부의 가족으로 어려움 없는 생활을 누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때 어머니 김부경 씨를 안심시킨 건 두 남매였습니다. 아버지 리정호씨의 말입니다.
[아버지 리정호] 우리 집사람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가면 돈이 없잖아, 어떻게 살겠나’ 그랬는데 이제 현승이하고 서현이가 우리가 가서 벌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
그러나 자본주의는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착 후 벌써 8 년. 이들 남매 역시 이민자로서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현승] 라면집에서 웨이터로 일했고, 주차장 알바도 했었고. 주차 알바 할 때 제가 실수를 했어요. 그러니까 손님이 저한테 화를 내면서 인종차별이라고 해야 되나? 저를 어떤 중국사람(Some Chinese Guy)이라고 말을 했대요. 저는 그때 당시에 인종차별인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다른 애들이 그 옆에서 말리는 거예요. 인종차별이라고…. 그렇게 또 미국 사회에 대해서 배운 거죠.
하루새 시사회 개최에 시험에 과제까지 무리했나봅니다. 서현 씨는 다음날 꼬박 하루를 앓았습니다.
[이서현] 크게 질병은 없는데, 피로가 쌓이면 면역이 떨어지다보니까 이게 긴장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끝나는 동시에 풀리다 보니까 그래서 그런가 봐요. 긴장을 놓아서 그런가 봐요.
몸도 다 나았겠다,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을 만나러 갑니다.
[이서현] 지금 비지니스스쿨에 가고 있는데요, 친구들을 만나러요. 한 명은 같이 공부했던 친군데 작년에 졸업했고, 다른 한 명은 비지니스 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우연히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는데. 근데 못 본 지 되게 오래됐어요. 다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까,
이제는 누가봐도 뉴요커가 된 서현 씨. 하지만 미국에 올 때까지 세계의 수도 ‘뉴욕’을 몰랐다고 합니다.
[이서현]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들어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북한에 있을 때는 나라와 수도는 다 배우거든요. 그래서 워싱턴 디씨는 알았는데 뉴욕은 딱히 몰랐었어요. 처음 왔을 때 한 거의 2~3개월 동안은 저녁에 해가 지면 못 나가겠는 거예요, 무서워서. 근데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요. 바로 적응해서 지금은 잘 다녀요.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네온사인 불빛으로 환한 이 곳은 타임스퀘어. 두 남매는 자본주의의 상징에서 북한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서현] 사실 보면 북한에도 정말 재능이 많은 친구들이 많은데 자신의 재능을 깨달을 기회조차 없이 노예처럼 생활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점인 것 같아요.
[이현승] 자유가 없었을 때는 모르잖아요. 내가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잖아요. 일단 있어보면 뺏기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 것 같아요.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야 하는 목소리 높이는 것도, 그 사람들이 자유를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새롭게 얻은 기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곧 졸업과 함께 미국사회에 진출을 앞두고 있는 이현승, 이서현 남매.
뉴욕의 고물가에 취업 준비라는 부담감도 있지만 이들에게 졸업은 '걱정'이 아니라 ‘설렘’입니다.
위험 속에서 목숨 걸고 탈북을 감행하고, ‘미국’으로 정착한 두 남매에겐 새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