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억류 선교사 아들 “김정은, 최소한의 양심 있다면 답변해야”
2024.03.26
앵커: 11년째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최춘길 선교사의 아들 최진영 씨는 지난 19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에서 열린 북한 인권 관련 부대행사에 참석해 아버지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최 씨가 언론에 얼굴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가 오랜 고민 끝에 공개적 대외 활동을 한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김정욱’, ‘김국기’ 선교사들의 이름과 그들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서혜준 기자가 유엔 부대행사 이후 직접 최진영 씨와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아버지 억류 사실에 충격…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
[기자] 최진영 씨,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고 사신 세월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진영] 사실 개인적인 사유도 조금 있고, 고등학교 이후로 아버지를 거의 뵙지 못했어요. 고등학교 때 학교 앞으로 찾아오셔서 뵀던 게 마지막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20대 중반쯤 됐을 때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했는데 그때도 찾지는 못했고요. 그리고 세월이 또 이렇게 흐르고 한국 통일부로부터 작년 11월에 연락이 와서 아버지가 (북한에) 억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기자] 아버지의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최진영] 제가 그때 외부에 나와 있던 상태였고, 근무 중에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사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통일부에 따로 다른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보고, 사무관님도 한 번 찾아뵀는데, 결론은 사실이었죠. 그러고 나니까 오래 뵙지는 못했어도, 제 아버지니까 손발이 많이 떨렸어요. 그리고 그날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한 3일 정도 연차를 써서 집에서 혼자 그 당시에 나왔던 기사를 많이 찾아봤던 것 같아요.
[기자] 가족들의 일상에도 당연히 영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진영]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냥 서민인데 (저희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게 확률적으로도 매우 희박한 일이기도 하고, 한 달 정도는 잠도 잘 못 잘 정도였어요. 근데 이제는 어차피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릴 수 있게끔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기자] 최진영 씨가 고등학생였던 비교적 어린 나이 때에 아버지가 북한에 억류되셨는데, 언제 아버지가 가장 그리우신가요?
[최진영] ‘그립다’라는 표현보다는 사실 ‘보고 싶다’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억류된 사실은 정말 슬프고, 화도 나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어려운 북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시기도 했고, 탈북민들도 많이 도와주신 걸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북한에) 억류되신 건 정말 안 좋은 일이지만, 그런 부분은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기자] 가장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으신가요?
[최진영] 추억… 완전 어릴 때여도 되나요? 예전에 아버님이 사냥을 나가셨어요. (사냥이) 불법이 되기 전의 일인데, 그때 가족들, 친인척과 같이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던 때가 제일 많이 생각나요.
[기자]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셨고, 아버지로서 진영 씨에게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진영] 사실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전에도 그랬고, 마지막으로 뵀을 때도 그런 활동을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저도 이번에 (아버지가) 선교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랑 같이 지냈던 때가 너무 오래 전이어서 제가 기억하는 건 매우 열심히 사셨던 것 같아요. 저를 위해서도 많이 노력하셨고요.
[기자] 다른 억류자 가족들분들과도 소통하고 지내시나요?
[최진영] 저처럼 억류자 가족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됐고, 김정욱 선교사님의 형님도 대외적으로 활동하시는 걸 제가 기사로 많이 봤어요. 그런데 사실 소통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 아버지가 억류됐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고, 사실 저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만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최근 들어 기회가 되면 솔직히 다른 가족분들도 한 번 찾아뵙고 싶기도 해요.
“북한에 억류된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기자] 이렇게 얼굴을 공개하고 언론에 입장을 전하는 것도 처음이신데,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됐나요?
[최진영] 이 부분이 저도 가장 생각이 많았던 부분이고, 제가 대외적으로 활동을 해야할지, 이런 데 나오는 게 맞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안에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란 이름은 많이 아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로 ‘김정욱’, ‘김국기’, 저희 아버님 ‘최춘길’ 이렇게 세 분의 성함은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국민도 같이 공감을 해줄 수 있게 세 분의 성함을 알게 된다면 ‘다시 돌아올 거다’라는 희망을 조금 더 많이 갖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고민했었어요. 왜냐하면 처음에 통일부 측과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제가 ‘얼굴은 나오기가 싫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래서 (과거) 기사들을 보면 제 뒷모습이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기사가 나갔어요.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나서지 않는다면 ‘세 분의 선교사를 비롯해 다른 세 분의 억류자들도 묻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저라도 (나서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세 분의 가족들이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비교적 젊은 제가 조금만 더 발벗고 나선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다짐을 했고, 이런 행보가 된 것 같습니다.
[기자] 직접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부대행사에서 처음 증언하신 소감도 궁금합니다.
[최진영] 아까 증언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보다는 더 긴장이 된 것 같아요. (미리 준비한 문장들을) 보고 읽긴 했지만, 만약에 이조차도 없었으면 말도 못했을 것 같아요. 읽을 때까지만 해도 앞에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긴장도 많이 했어요. 근데 다 읽고 (행사가) 끝났을 때 모르시는 분들이 와서 ‘잘 들었다’라며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성공적이지 않았나’, 또 ‘관심을 갖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서 뿌듯한 것도 없지 않았고, 조금의 자신감도 생긴 것 같아요. 북한 인권, 또 억류되신 분들의 가족에게도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활동을) 해보려고 합니다.
[기자] 물론 한국 통일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오셨지만, 앞으로 한국 정부의 어떤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최진영] ‘생사 여부’와 ‘송환 촉구’가 가장 중요하죠. 제가 얘기는 들어보진 않았지만,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교사님 가족도 이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과 함께 세 분의 (선교사들의) 성함을 널리 알 수 있도록 도움을 많이 주셨으면 합니다.
[기자] 이 문제와 관련해 국제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요?
[최진영] 이런 문제점에 대해 공감해 주시고, 널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 입에 많이 올라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까 그런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주셨으면 합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억류한 북한 정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최진영] 가족으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북한은 거의 인권이 없는 나라잖아요.
그러다 보니 지금 (억류자들의) 생사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송환 여부는 더욱 확인이 안 되는 부분이다 보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억류자뿐 아니라 전쟁 후 납북자 등에 대해 답변이라도 줬으면 좋겠어요. 한국 정부도 북한에 아예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근데 북한이 너무 묵묵부답이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가족으로서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김정은 정권에 말이 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기자] 네, 말씀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에 억류된 최춘길 선교사의 아들 최진영 씨와의 대담이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혜준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