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오명 벗고 ‘주인공’ 새 삶 여는 영국 탈북민들
2023.09.12
식당 2층, 방 한 칸에 사는 ‘거북이’
2023년 4월 30일, 영국의 한인타운 뉴몰든.
한글 간판이 가득한 번화가의 한 건물 뒤로 2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이 있습니다.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들어선 작은 방.
사람 한 명이 누울 정도의 침대와 낡은 책상, 그리고 의자 위에 걸려 있는 건설 현장 작업복 몇 벌. 한눈에 들어온 그의 살림살이 전부입니다.
한식당 ‘야미’의 2층에 있는 이 공간이 탈북민 화가 이명관 씨의 보금자리입니다.
그의 활동명은 설 리(Surl Lee).
그가 2년 반 동안 깎고 부수기를 수천번 반복하며 완성한 작품, ‘거북선’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식당 뒤편, 식자재 냉장고와 상자들 사이에 걸려 있습니다.
[설리] 저기 거북이 두 마리가 있는데, 이건 미지의 내 마음 속에 있는 나와, 현실 속에 있는 내가 진짜 나를 찾아가는 것을 표현했어요.
웬만한 성인 남성 크기에 입체적인 이 그림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 친구의 식당에 맡겨놨습니다.
거북이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자신을 표현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걸려 있는 작품이 마치 지금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설리 씨의 어릴 적 꿈은 도예가였습니다.
[설리] 북한에 있을 때부터 저희 할아버지가 도예가셨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도자기를 많이 접했고, 할아버지의 작품집을 보면서 따라 그려보기도 했죠. 그러다 ‘나도 나중에 커서 멋진 아티스트가 돼야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고난의 행군 시기였던 1997년 겨울,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설리 씨는 먼저 탈북한 엄마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습니다.
그 후 그는 함흥에 있는 노동 교화소(55호 노동단련대)에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성천강 바닥을 파는 노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습니다.
[설리] 감옥에서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 찾으러 간 것이 죄냐. 아직 나는 미성년자인데” 이런 반감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못 살겠다. 어떻게든 나가야겠다”.
설리 씨는 노동교화소에 수감된 지 일 년 만에 풀려났지만, 반역자란 낙인 탓에 하고 싶은 도예나 미술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대로 살지 못하는 나라,’ 설리 씨가 묘사한 북한입니다.
[설리] 어차피 이 나라에서 살아도 내가 숨 쉬는 것 같지 않고, 항상 감시 체제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나라에서 무슨 희망으로 살아야 할지…
그 길로 그는 또다시 북중 국경을 넘었습니다.
화가라는 꿈을 안고 2014년 영국 땅을 밟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하지 못합니다.
[설리] 어떤 갤러리 원장님을 만났는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너무 상처를 받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너는 자격 미달이야"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졸업장이라든가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작업을 해야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하더라고요.
매달 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에 대한 부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지독한 외로움이었습니다.
[설리] 단절된 느낌. 제가 “북한에서 왔어요”라고 하면 어느 정도 편견을 갖고 시작해요. 그때부터는 이미 나도 모르는 상처가 되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대화가 되더라고요.
설리 씨는 지금도 건설 현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 한 켠에, 일 년 넘게 미완성인 작품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어내려봅니다. 그의 책상 옆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팔레트가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예술가로 살고 싶은데, 빈곤한 현실 앞에서 자꾸만 자신의 꿈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설리] 사람들이 나보고 “생각 없는 놈”, “철없는 놈”이라고 해요. “왜 이 나이 되도록 소꿉놀이하듯이 아직도 ‘꿈’, ‘꿈’ 거리고, 나이를 40이나 먹었는데, 아직도 꿈꾸고 있냐”고 물어요. 하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고, 그걸 성취하는 성취욕도 생겨야 삶의 의미라는 게 있잖아요. 꿈이 없으면 대체 뭘 위해 살아야 해...?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설리 씨가 씨익 웃어보입니다.
아직 그의 꿈과 처한 상황은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있지만, 그 현실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오늘도 거친 조각칼을 집어 듭니다.
‘자유’… 내면으로부터의 외침
설리 씨 집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영국 수도 런던의 근교 도시 몰지(Molesey)에는 다른 이들과 꿈을 나누기 시작한 탈북민 기타리스트가 있습니다.
5월 1일, 빨간 벽돌로 지은 한 아파트 2층 전예영 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거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클래식 기타들은 그녀의 보물 1호입니다.
갈색 단발에 곱슬 파마를 한 전 씨가 손님을 맞아 익숙하게 커피를 내립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영국식 억양이 나오고, 말과 행동에서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전예영] 북에서는 “여유, 이 말이 뭔 말이야?” 그래요. 여유롭게, 한가하게, 로맨틱이라는 것은 상상이 안 되죠, 북한에서는 안 맞는 얘기예요.”
북한에서 행복이나 슬픔의 감정이 느껴지는 곡은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게 한다는 이유로 금기시됩니다.
오직 음악은 정치적인 목적이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입니다.
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좋은 집안의 막내 딸로 태어난 전 씨는 어머니의 권유로 6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우다, 기타를 연주하던 오빠의 모습을 보고 한순간에 기타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막 10살이 돼 만난 첫 기타 선생님.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전예영] 그분이 “내가 너를 조선에서 기타를 제일 잘 치는 애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어요. 북한에서 애들한테 꿈이란 게 있나요. 없죠.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내가 뭐가 되려나’라는 기대가 생겼던 거예요. 그 작은 씨앗이 이제 꿈이 돼버린 거예요. ‘나중에 나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돼 볼까?’
전 씨가 연주한 이 곡의 제목은 레인 드롭(Rain Drops)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조지 C. 린제이가 작곡한 곡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기타 선율로 표현했습니다.
[전예영] 선생님이 제게 레인 드롭 악보를 안 주셨고, “배울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이 곡이 너무 예뻐서 선생님께 갈 때마다 “선생님 저 곡 연주해 주세요”라고 하고, 제가 들은 대로 연주했어요. 자꾸 기억이 났어요. 집에 가서 제가 들었던 소리를 카피한 거죠.
전 씨는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그는 이때부터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예영] 사막의 물방울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물이 없는 사막에서 물 한 방울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갈증을 느낄 때 그 물이라는 것 자체가.
17살이 되던 때 전 씨는 북한 음악 음악 선전대 입단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집단 진출, 즉 강제로 농촌에 끌려가 농사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기타리스트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전 씨는 결국 잠든 가족들을 뒤로하고 밤길을 숨죽여 달렸습니다.
탈북 후 전 씨는 2008년에 영국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위해 호텔 청소나 미용실 보조 같은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악기 연주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손은 퉁퉁 붓고, 관절은 마디마디가 쑤셨습니다.
어느 날 전 씨가 호텔에서 사무실 청소를 할 때의 일입니다.
[전예영] 어느 날 아만다라는 매니저가 밖에 담배꽁초가 널려있다며 주차장 청소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도 내가 청소부였지만, 자존심은 살아있었어요. “원래 처음에 계약할 때 사무실 청소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자기는 매니저이기 때문에 시킬 수 있대요.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빨라집니다. 어느새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도 치켜 올립니다.
[전예영] 제가 ‘노동착취’라는 말을 한국어로는 할 수 있는데 영어로는 그 단어를 모르는 거예요. 옛날에는 전자사전이 있었거든요. 아만다한테 “너 기다려”라고 하고, 책가방에서 전자사전을 가져와서 “Exploitation!”이라고…
북한에서 온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낸 첫 용기였습니다.
전 씨는 영국에 정착한 이후 오로지 일과 학교에만 열중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전 세계 공연 예술 학교 10위 안에 드는 영국 ‘길드홀 음악 연극 학교’에서 클래식 기타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하지만 전 씨는 그 길의 끝에서 오히려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전예영] 저는 정신없이 달린 거예요. ‘(부모님이) 보고 싶은 만큼 열심히 해야지’라면서. 작년에 졸업식을 하고 나서 이제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서히 마음 속에 ‘나는 부모님께 잘한 것도 없고, 나는 왜 그렇게 태어났어야 했고, 나는 왜 그렇게 왔어야 하는지’…
지난 세월 꾹꾹 눌러온 감정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습니다. 어디엔가 마음을 나눌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영국 내 탈북민들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 ‘커넥트 북한’이었습니다.
한인사회와 철저히 거리를 두며 단절된 삶을 살아온 그는 정착 15년 만에 다른 탈북민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씩 탈북민 자녀들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전예영] 예전에는 제가 북한에서 왔다는 걸 잊고 싶었어요. 어쩌면 (제가 북한에서 온 게) 아닌 척했던 거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북한 사람들은 무언가 마음의 아픔을 갖고 있어요. 저도 아픈 마음이 있잖아요. 북한 사람이 북한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할까요?
애써 혼자만 품고 살았던 아픈 기억들.
하지만 전 씨는 다른 탈북민들도 자신처럼 말 못할 아픔이 있을 거란 생각에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릴 거예요.”
영국 지역사회를 넘어 전 세계를 누비며 북한 인권 활동을 펼치는 탈북민도 있습니다.
영국 맨체스터 테임사이드(Tameside)의 덴턴사우스구(Denton South Ward).
지난 5월 2일, 유난히 찬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에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이 지역 구의원 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한 탈북민 티모시 조 씨입니다.
[티모시 조] 더 들어주는 만큼 주민들은 더 나눠요. 특히 저 같은 경우는 독재시스템을 경험해 봤고 선거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여기 와서 지역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후보자가 되어서 출마했는데 그래서 한표한표가 엄청 소중해요.
올해로 지방선거에 세 번째 도전한 조 씨는 북한의 꽃제비 출신입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자신을 남겨두고 탈북하면서 한순간에 ‘조국을 반역한 자’의 자식이 된 조 씨.
길거리로 내쫓긴 그가 북한에서 받은 교육은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까지가 전부입니다.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딱지가 붙어 군에 입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티모시 조] ‘이 땅에서 내가 어떤 걸 해도 결국, 나는 반역자의 자식이고 내 자식들도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에 그때 마음을 먹고 북한을 탈출했어요.
조 씨는 강제 북송을 비롯해 중국에서 세 번, 북한에서 한 번. 총 네 번의 감옥 생활을 이겨 내고 끝내 영국이라는 자유의 땅을 밟았습니다.
[앤] 아기는 어때?
[티모시 조] 많이 울죠.
[마리] 잠 못 들게 하는구나.
[티모시 조] 아들이 매일 아침 5시 45분이면 깼다가 다시 잠드는데, 저는 잠을 설치죠.
[앤] 딸이랑 아들이랑 잘 지내?
[티모시 조] 딸이 동생을 너무 예뻐 해요.
조 씨가 탈북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 아픔으로 힘들어하던 시기, 포근한 집과 가족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2층집, ‘디 아크(The Ark)’라는 이름의 쉼터입니다. 조 씨는 유세로 바쁜 와중에도 잠시 들러 따뜻한 밥 한끼를 함께 합니다.
[티모시 조] 여전히 여기에 자주 와요. 여기 사람들은 제게 가족 같아요. 이분들이 한반도를 위해 기도도 많이 해주시죠.
영국에서 치과의사를 꿈꾸던 그는 어느 날 “영어를 배워 전 세계에 북한 인권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한 탈북민의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그간 잊고 지낸 아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길에서 굶주리며 죽어간 친구들, 군중 사이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북한 주민들, 함께 감옥에 수감돼 있다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 그는 그렇게 인권운동가의 길에 뛰어들게 됩니다.
[티모시 조] 북한의 문이 열리는 걸 빨리 보고 싶어요. 북한 사람들이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지도자를 만나서 자유롭게 시장경제 활동도 하고, 자유롭게 남한과 북한이 왕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고 있는 삶이 가끔 ‘내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북한에 있을 때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기 때문에요.
2008년 영국에 정착한 그는 자신이 영국 정치인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 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이곳 영국에서 말입니다.
[티모시 조] 북한에서 정치권에 들어가는 당원은 극소수예요. 특히 저는 ‘도망자의 자식’이라는 딱지가 있어서 상상할 수 없었어요.
언젠가 북한에서 정치를 할 기회가 온다면 서슴지 않고 북한 정치인이 될 거라 말하는 그의 눈이 반짝입니다.
5월 4일. 드디어 결전의 날을 맞았습니다. 지방 선거 당일에도 조 씨의 발걸음은 바쁩니다.
투표 마감 시간까지 골목 곳곳을 돌며 주민들에게 한 표를 당부합니다. 때마침 투표를 마치고 걸어나오는 한 영국인 부부가 ‘당신에게 투표했어요’라고 건넨 말 한마디에 그는 힘을 얻습니다.
선거 당일 밤 11시, 개표 시간에 맞춰 조 씨가 개표장으로 향합니다.
수개표가 진행 중인 커다란 강당에는 후보자들과 당 관계자들, 취재진들, 개표 봉사자들로 가득합니다.
보수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브로치를 달고 있는 조 씨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합니다.
[티모시 조] 잘 모르겠어요. 지금 혼돈이 돼요. 지금 노동당 후보들과 거의 근접한 표수가 나와서요. 몇 표 차이로 지게 될지, 아닐지 잘 모르겠어요.
[취재진] 박빙의 승부인가요?
[티모시 조] 네,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새벽 2시, 드디어 개표 결과가 발표됩니다.
[선거관리위원] 보수당, 티모시 조 666표!!
아쉬운 낙선. 그러나 그는 긴 여정과 같았던 세번째 선거를 마친 후 긴장이 풀린 듯 홀가분하게 미소 짓습니다.
[티모시 조]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리고 도전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아직도 배우는 과정이고, 계속 도전해서 제가 도와주고 싶은 분들의 대변인으로 도약하고 싶어요. 지금은 지방선거에 불과하지만, 다음에는 총선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개표 다음 날인 5일 아침, 맨체스터 공항에 갈색 코트를 입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조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손에는 영국 여권이 들려 있습니다.
선거 유세와 밤샘 개표를 마친 그가 숨돌릴 시간 없이 향하는 곳은 남미의 나라 브라질.
그곳에서 또 북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고, 북한 주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섭니다. 기자가 돼서 전 세계를 다니고 싶었다는 어릴 적 꿈은 영국에서 현실이 됐습니다.
[티모시 조] 여권이 뭔지도 모르는 유일한 나라가 북한인데, 저는 지금 여권을 들고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다니고 있습니다. 이건 어찌 보면 북한에서 탈출한 제게 주어진 사명인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처럼, 조 씨의 도전은 오늘도 멈추지 않습니다.
[티모시 조] 총선을 통해 영국 의원이 된다면 북한 인권 활동이나 한반도에 더 많은 관심이 가도록 영국과 한반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밖에도 영국의 많은 한인들이 정치권에 도전하는 희망을 심어줄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여권을 쥔 손을 흔들며 당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티모시 조] 다음에 또 봐요!
에디터 박정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