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출신 첫 정교수 “북한 인재 양성이 꿈이에요”
2024.09.13
앵커: 탈북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교수에 임용된 한국 부산외국어대학교의 김성렬 교수는 10대에 탈북했다가 강제 북송됐지만, 재탈북 끝에 한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대학교 학사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는데요. 교수라는 꿈을 이루기까지 도전과 쟁취의 연속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젊은 세대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자신감’이라고 조언했는데요.
천소람 기자가 현재 진행형인 김성렬 교수의 꿈을 들어봤습니다.
“10대의 결핍이 공부에 대한 갈증 키워”
[김성렬] 10대 시절 경제난으로 탈북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에서는 북송의 위협, 노동 착취, 인신매매 등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경우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노동 현장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제 마음속에 생겼던 것 중 하나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나는 공부를 할 수 없는지’, 그러면서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11살의 나이에 처음 탈북해 한 차례 북송을 당하고, 재탈북을 거쳐 2005년 한국에 정착한 김성렬 교수.
그는 ‘탈북민 출신 첫 정교수’로 일 년 넘게 한국 부산외국어대학교의 외교 전공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지난해 2학기부터 ‘국제정치이해’와 ‘남북관계론’ 등을 수업했고, 올해 봄학기부터는 학생들에게 ‘북한 사회 이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에 대한 관심도는 어떤가요?
[김성렬] 북한에 관한 관심이 꽤 높은 편이에요. ‘북한 사회 이해’라는 수업을 지난 학기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는데요. 통일부의 지원을 받아 수업이 운영되는데, 매번 40명 정원이 다 차고, 추가적으로 수강 신청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거죠.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탈북, 북송, 그리고 재탈북
김 교수는 1985년, 함경북도 청진의 외곽 지역인 라남구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따른 경제난으로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던 1997년, 어머니는 그와 그의 누나에게 “탈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성렬] 정말 어려웠고, 많은 사람들이 아사했고, 특히 죽은 어린이들이 모습을 제가 많이 봤던 것 같아요. 길거리에서 얼어 죽고 배고파서 죽는 모습을 보고, 저희도 거기서 버틸 수가 없었던 상황에 어머님이 ‘탈북해야 한다. 북한에서 죽든지 탈북하다 죽든지 간에 선택은 떠나야 된다’라고 말씀하셔서 탈북하게 됐습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던 이듬해 3월, 김 교수는 어머니와 누나의 손을 잡고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두만강을 건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성렬] 탈북하는 과정에서는 브로커, 중국과 북한 두만강 연선 수비대에게 돈을 주고, 그때 당시 북한 돈으로 5천 원 정도인데요. 지금 환산해 보면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 될 겁니다.
탈북한 그의 가족은 중국 허베이성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당시 탈북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성렬] 2살 위 누나도 취직했고요. 중국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안들이 들어온 거예요. 공안들이 들어와서 저희를 체포해서 공안 당국으로 갔더니 이미 거기에 어머님이 잡혀 와 계시더라고요. 어머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어떤 중국인이 우리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신고해서 잡혀 왔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북송될 것이다”, “처형당할 것이다”라는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애원도 했지만, 결국 북송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성렬] 저희가 북한에 있을 때 북송된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봤어요. 탈북한다는 행위 자체는 북한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조건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사실 절망감을 많이 느꼈어요. 결국 북송이 됐죠. 신의주 보위부에서 약 한 달 동안 조사를 받고, 신의주 집결소라고 하는 곳에 이송돼서 3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남북 간에 평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였고, 북송된 그의 가족은 극적으로 3개월 만에 석방됐습니다.
[김성렬] 2000년 3월에 잡혀 북송되고, 석방된 시점이 6월 초였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래서 석방이 돼서 그해 8월에 다시 탈북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석방된 것도 ‘남북정상회담에 방해 안 되게끔 잡혀 온 사람들을 잘 석방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석방이 됐고요.
[기자] 북송, 극적인 석방, 그리고 재탈북. 교수님에게 2000년은 잊을 수 없는 해일 것 같습니다.
[김성렬] 당시는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짧은 시간에 운 좋게 석방이 됐지만, 6월이 지나 7월부터는 다시 북한 정권이 강제 북송된 사람들을 장기적으로 가둬두고 처벌 수위를 높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예 탈북을 시도한다거나 한국행을 시도한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을 때 정치범수용소로 보낸다고 해요. 그만큼 처벌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겠죠.
재탈북 후 중국에서 공장을 전전하던 김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탈북 브로커와 연이 닿았고,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11살에 첫 탈북을 시도했지만, 20살이 돼서야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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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일 년 만에 초·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습니다.
[김성렬] 사실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까 보이는 게 없더라고요. 그냥 공부만 보이는 거예요. 계속 책을 읽게 되고, 공부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때 고려신학대학원이 천안에 있었어요. 거기에 석사(공부를) 하는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계셨어요. 그분들을 찾아가서 과외를 받으면서 부족한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시험을 다 패스하고 있더라고요.
탈북, 강제 북송, 힘든 노동의 반복이었던 10대 시절은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공부에 대한 갈증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서 열정과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기자] 계속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니며 공부하셨군요.
[김성렬] 아마 10대 때 공부하지 못했던 한이 맺혀있나 봐요. 학사, 석사, 박사 모든 과정이 다 그래요. 스스로 공부하더라도 부족하잖아요. 공부하다 막힐 때가 있고, 글을 쓰다가 막힐 때가 있으면 무조건 누군가를 찾아가요.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한국 한동대학교 국제지역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교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필수 영어 수업 때문이었습니다.
[기자] 대학교는 7년을 다니셨습니다. 왜 7년이 걸렸는지,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성렬] 첫 학기 수업을 듣고 나서 그때 당시 제 영어 실력으로 이 모든 수업을 수행할 수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아마 첫 학기 두 번째 주에 제가 심각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포기하고 ‘같이 탈북해서 온 친구들처럼 다른 직장에 가서 돈을 벌까’라고 생각을 하다가 결국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영어 공부를 위해 휴학 후 일을 해서 번 돈과 기독교 단체의 도움으로 영국과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됐습니다.
어학연수 이후 영어에 자신감이 생긴 김 교수는 한국 연세대학교 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는데, 영어 시험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거듭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김성렬] 영어 성적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래서 제가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어요. ‘저는 미국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공부하는 데 필요한 재정이 없습니다’. 장학금 같은 프로그램이 있는지 설득했고 나중에 그분이 저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미국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김 교수는 한미 교육위원단에서 운영하는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시러큐스 대학교(Syracuse University)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장학금도 직접 찾아가서 요청하신 거군요. 지금까지 과정을 들으면 계속 쟁취하신 게 많네요.
[김성렬] 그렇게 안 하면 탈북민의 경우 남한 사회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그 장벽을 허물 수가 없어요. 자기 스스로 노력함과 동시에 누군가와 함께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한국 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입국 인원 현황’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약 3만 4천 183명입니다.
한국과 해외에 정착한 탈북민, 특히 10대에서 20대의 젊은 탈북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에 답하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열정이 교차했습니다.
[김성렬] 꿈을 꿔줬으면 좋겠어요. 꿈. 북한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꿈을 꿀 수가 없어요. 거기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한 안에서도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더 좋은 삶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삶을 추구할 때 중요한 게 꿈인 것 같아요. 꿈을 꿔야만 그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동적인 인간에서 능동적인 인간으로 바뀌고, 그 꿈을 가지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 고향을 떠나 여러 국경을 넘어 한국 사회에 정착했지만, 또다시 수많은 경계와 장애물을 마주한 탈북민들에 김 교수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김성렬]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어 한국 사회에 와서 심리적인 경계라는 것을 넘어야 합니다. 경계들을 수없이 계속 넘어야 하는 상황인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감과 자존감인 것 같아요.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울 수 있는 내면적인 힘, 외유내강이라고 하는 자세를 갖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교수로 임명된 지 일 년이 지난 그에게 꿈을 이룬 소감을 묻자 “교수가 된 것은 단기적인 꿈”이라며, “장기적인 꿈은 북한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두 번의 탈북과 북송을 거쳐 탈북민 최초로 한국 대학교 정교수에 임용된 김성렬 교수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천소람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