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북한 인민군과 로므니아 군대의 교훈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24.10.22
[스칼라튜] 북한 인민군과 로므니아 군대의 교훈 1991년 9월 28일, 부쿠레슈티 대학 광장에서 길을 청소하고 있는 한 여성 옆으로 장갑차가 지나가고 있다. 정부 보안군은 부쿠레슈티 중심부를 보호하고 3일간의 반정부 폭동 동안 광부들이 세운 바리케이드를 철거했다.
/AP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35년 전1989년 12월 로므니아 (루마니아)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켜 주민들에 의한 반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보장했습니다. 반공 혁명의 결과는 로므니아 공산주의 독재를 제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 것입니다.

 

로므니아 군대에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공산주의 로므니아에서는 탄압과 통제에 의해 군주제와 다당제 등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제도와 체제가 사라졌고, 로므니아 정교회와 같은 전통적인 기관은 멸종 위기에 처할 정도로 억압받았습니다. 일당 체제 내에서 가입할 수 있는 두 개의 거대 당국은 공산당과 군대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로므니아 성인의 약 20%가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당원 가입은 제한적이었고 배경 조사와 특정 조건에만 가능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8세 이상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성은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1989년 로므니아 인구는 2천3백만명, 군대의 병력은 약 14만 명이었으나 그중 10만 명 정도가 징집병이었습니다. 모든 와르샤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입국 중 9-16개월의 복무 기간으로 가장 짧았습니다.  국경 경비대, 해병대와 해군은 다른 징집병보다 더 길게  24개월까지 복무했습니다. 북한의 로동적위군과 비슷한 로므나이 군사애국경비대는 62 세 미만의 모든 남성과 57 세 미만의 모든 여성을 포함했습니다. 북한의 국가보위성과 비슷한 내무부 산하의 내부  보안군, 즉 ‘세쿠리타테’는 2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대부분이 징집병이었습니다. 북한의 사회안전성과 비슷한 경찰 또는 민병대는 약 3만 명이었습니다. 내무부 내의 유일한 ‘특수’ 전투 부대는 약 500 명의 대통령 경호원과 약 800명의 대테러 부대원이 있었습니다. 1989년 12월 반공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내무부 병력은 폭동 진압 경험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또한 비살상 무력 사용을 통한 폭동 진압 경험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로므니아 독재는  정보원, 밀고자, 탄압과 통제에 의존했습니다. 수십년동안 북한처럼 반란은 조직적인 반란으로 발전하기 전에 고문, 구속과 살인을 통해 신속하게 처리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1977년 석탄 광부 파업과 1987년 브라쇼브 (Brașov)시에서 발생한 소규모 반란으로, 2만 명의 강력한 시위가 해산되었습니다. 그당시 사상자와 300명의 체포자만 발생했습니다. 1989년 12월 며칠동안 내무부와 국방부 군인들의 무차별적 무력 사용에 의해 초기 혁명이 시작된 티미쇼아라 (Timișoara)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므니아 군대는 계속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공산주의 독재 탄압에 의해 다른 모든 기관과 다당제가 사라지고 로므니아 정교회가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했고, 남은 유일한 기관은 공산당과 군대 뿐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을 모든 악의 근원이자 차우셰스쿠의 하수인으로 여겨졌지만, 군대는 고위급 장교를 제외하고는 정치탄압, 독재자 신격화, 극심한 식량과 소비재 부족에 책임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주민들은 군대를 유일하게 신뢰성이 있는 기관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로므니아 공산당 선전선동부는 국가 역사와 과거의 왕과 장군들의 이야기를  독재자의 신격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선전은 군대를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던 기관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의 정당성을 더욱더 강화시켰습니다.

 

1989년 12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차우셰스쿠의 궁전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군주제’를, 다른 일부는 ‘군부 독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 큰 혼란감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로므니의 여러 도시 거리에서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백을 메우고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기관은 군대였습니다. 로므니아 군대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습니다. 군대는 무질서를 어느 정도 제거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고 초기에 필요한 보안을 제공했습니다. 차우셰스쿠 이후의 민간 통치, 전환 초기, 사람들은 민주적 변화보다는 생활 수준 향상에 더 초점을 맞추며 다소 근시안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구원전선’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대부분 구 정권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북한과 1989년 12월 로므니아 사태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북한에서는 로므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사의 자유나 시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대규모 시위대가 모일 기회 또한 당국 허가 없이 주지 않습니다. 북한 보안군에 의한 탄압,통제와 처벌은 비인간적 반인륜 범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북한 보안국은 1989년 로므니아처럼 군중을 통제하기 위한 비살상 수단을 사용해 본 경험이 부족합니다. 만일 로므니아처럼 대규모 주민운동이 일어나면 시위에는 군대를 투입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로므니아 군대는 독재자에 대한 충성이 있었지만, 결국 주민의 군대였습니다. 로므니아 군대는 며칠 동안 민간인에게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했지만 결국 그 비인간적 범죄는 지속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는 혁명가들과 함께 독재자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북한의 인민군은 최고 지도자와 노동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만 결국 인민의 군대입니다. 만약 북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면 과연 인민군은 최고 지도자를 옹호할 까요 아니면 1989년 12월 로므니아 군대처럼 인민을 옹호할까요?

 

에디터 박정우,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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