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수필] 거꾸로 달리는 북한의 경제 개혁
그레그 스칼라튜
2008.12.02
2008.12.02
지난 몇년 동안 북한 주민들은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포함해 소비재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중국 상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평양 제 1백화점과 같은 큰 상점에서 팔리는 상품 중 90% 이상이 중국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북한 당국은 일본산 자동차 운행을 금지하면서 간부들이 몰고 다니던 일제 자동차를 몰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산 중고 자동차 수입을 금지하고 자동차의 수입 관세를 많이 올릴 예정입니다.
개성 관광,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한의 경제 협력은 계속되는 북한 경제위기의 유일한 생명줄임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과 철도 운행을 전면 중단하며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한 업체한테 철수 대상자의 명단을 요구하며 남한 인력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개성공단과 같이 북한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수 있는, 이러한 남북한 간의 경제 협력 사업이 완전히 무너질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북한 당국은 바깥 세상과 하는 경제 교류뿐만 아니라, “고난의 행군”이후로 북한 내 곳곳에서 벌어진 장마당까지 엄격하게 제한하려 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모든 시장을 농민 시장으로 개편하고 이런 사장도 한달에 서너 번밖에 못서게 하려합니다. 북한 주민은 앞으로 쌀은 양정사업소에서만 구입할 수있으며 여전히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 속에서 장마당에 더는 의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1989년말까지 공산주의 독재국가이던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자유시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특히 옛날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루마니아를 교훈으로 삼아 배울 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체스쿠는 주체사상과 개인 숭배, 그리고 평양의 웅장한 도로를 접한 뒤 크게 감탄한 나머지 귀국 후 수도인 부카레스트를 평양처럼 대중이 모여서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루마니아식 "주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연필에서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외국의 협조없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어느 정도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탓에 서방 세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과 서유럽 간의 경제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과 화학 산업은 물론 항공기 산업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우체스쿠는 한편으론 경제성장을 만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정치, 사회, 경제분야의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북한 방문을 통해 반드시 루마니아식 "주체"를 이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루마니아에서 그나마 화학 산업과 석유 산업 등과 같은 중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외국 자본의 투자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차우체스쿠가 고립 정책을 고수한 탓에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외채를 갚기 위해 루마니아는 농산물과 식료품을 해외에 수출해야 했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산업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부품은 물론 소비재의 수입을 끊어버렸습니다. 식량 부족과 전력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던 루마니아 국민은 소련이 와해할 조짐을 보이던 1989년 말 마침내 반독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유혈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독재자 차우체스쿠와 남편 위세를 등에 엎고 날았던 부인 엘레나도 군사 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루마니아식 "주체"의 실패는 오늘날처럼 국가 간의 상호 의존이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촌 시대에 북한과 같이 대외적인 고립과 독재 체제에 안주하는 나라는 결국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정치.사회.경제 개혁의 길을 선택하여 성공한 동유럽 나라들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정치 개혁을 거부하는 중국이나 베트남까지도 자유시장 원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습니다. 북한이 외국산 소비재 수입을 막고 남한과 하는 경제 협력을 제한하고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거부하면서 억지 고집으로 북한 경제의 어두운 미래를 계속 이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개성 관광,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한의 경제 협력은 계속되는 북한 경제위기의 유일한 생명줄임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과 철도 운행을 전면 중단하며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한 업체한테 철수 대상자의 명단을 요구하며 남한 인력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개성공단과 같이 북한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수 있는, 이러한 남북한 간의 경제 협력 사업이 완전히 무너질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북한 당국은 바깥 세상과 하는 경제 교류뿐만 아니라, “고난의 행군”이후로 북한 내 곳곳에서 벌어진 장마당까지 엄격하게 제한하려 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모든 시장을 농민 시장으로 개편하고 이런 사장도 한달에 서너 번밖에 못서게 하려합니다. 북한 주민은 앞으로 쌀은 양정사업소에서만 구입할 수있으며 여전히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 속에서 장마당에 더는 의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1989년말까지 공산주의 독재국가이던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자유시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특히 옛날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루마니아를 교훈으로 삼아 배울 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체스쿠는 주체사상과 개인 숭배, 그리고 평양의 웅장한 도로를 접한 뒤 크게 감탄한 나머지 귀국 후 수도인 부카레스트를 평양처럼 대중이 모여서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루마니아식 "주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연필에서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외국의 협조없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어느 정도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탓에 서방 세계의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과 서유럽 간의 경제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과 화학 산업은 물론 항공기 산업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우체스쿠는 한편으론 경제성장을 만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정치, 사회, 경제분야의 개혁을 원치 않았습니다. 북한 방문을 통해 반드시 루마니아식 "주체"를 이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루마니아에서 그나마 화학 산업과 석유 산업 등과 같은 중공업을 발전시키려면 외국 자본의 투자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차우체스쿠가 고립 정책을 고수한 탓에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외채를 갚기 위해 루마니아는 농산물과 식료품을 해외에 수출해야 했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산업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부품은 물론 소비재의 수입을 끊어버렸습니다. 식량 부족과 전력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던 루마니아 국민은 소련이 와해할 조짐을 보이던 1989년 말 마침내 반독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유혈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독재자 차우체스쿠와 남편 위세를 등에 엎고 날았던 부인 엘레나도 군사 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루마니아식 "주체"의 실패는 오늘날처럼 국가 간의 상호 의존이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촌 시대에 북한과 같이 대외적인 고립과 독재 체제에 안주하는 나라는 결국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정치.사회.경제 개혁의 길을 선택하여 성공한 동유럽 나라들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정치 개혁을 거부하는 중국이나 베트남까지도 자유시장 원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습니다. 북한이 외국산 소비재 수입을 막고 남한과 하는 경제 협력을 제한하고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거부하면서 억지 고집으로 북한 경제의 어두운 미래를 계속 이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