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북한 사상에 반한 로므니아 독재자
2024.10.15
로므니아 (루마니아)의 니콜라 차우셰스쿠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공산주의 독재 국가를 철권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대중적인 유혈 반공산주의 혁명으로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가 몰락했으며 군사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했습니다.
1971년부터 차우셰스쿠와 북한의 김일성은 평양과 로므니아의 수도인 부꾸레쉬띠 (부카레스트)에서 여러 번 만났고, 차우셰스쿠는 북한식 초현실적 인격 숭배, 국가적 공산주의, 그리고 자력갱생,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에 첫눈에 반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그 후 로므니아 사람들의 인권을 짓밟고 해외 여행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1977년 3월에 발생한 7.2 리히터 규모 지진 이후 재건설 명목으로 수도 부꾸레쉬띠의 많은 동네를 파괴했습니다. 한때 아름다운 도시 ‘작은 파리’로 알려졌던 부꾸레쉬띠는 동구라파의 ‘평양의 복제품’으로 변했습니다. 독재자의 지시에 의해 교회, 성당, 아름다운 주택가를 포함한 고전 건물을 파괴하고 대신 커다란 건물과 독재자를 숭배하기 위해 수천 명이 강제로 모일 수 있는 대광장을 건설했습니다. 차우셰스쿠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수만 명 앞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사회주이자’나 ‘밝은 사회주의 미래’에 대해 연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김일성 ‘주체 사상’을 교훈삼아1970 년대 외국의 많은 돈을 빌려 비효율적 산업 부문을 만들었습니다. 북한과 다른 공산주의 독재국가처럼 로므니아의 경제를 주도하는 것은 비교이득,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독재자의 지시 뿐이었습니다.
차우셰스쿠의 유일한 목적은 주민들의 복지가 아니라 자급자족을 주장하고 로므니아의 주체 브랜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차우셰스쿠는 막대한 양의 로므니아 소비재를 수출하고 수입을 대폭 줄임으로써 외채를 상환했지만 식량과 에너지 부족을 초래했습니다. 일반 주민들은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차우셰스쿠 정권 하에서 다른 동구라파 공산주의 독재국가들보다 로므니아 사람들의 삶은 북한과 가장 비슷했습니다.
1989년 12월 서부 도시 티미쇼아라에서 시작된 반공산주의 혁명은 곧바로 수도 부꾸레쉬띠를 포함한 로므니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차우셰스쿠의 몰락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대중 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 독재의 종말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중 운동의 성공을 보장하고 엄청난 유혈 사태를 피한 것은 사실상 로므니아 국방부가 일으킨 쿠데타였습니다.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수십 명의 시위대가 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가운데, 국방부 장관인 바실레 밀레아 (Vasile Milea) 장군이 가슴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즉시 빅토르 스턴쿨레스쿠 (Victor Stǎnculescu) 장군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장군은 직속 상관인 차우셰스크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직속 상관이자 군 통수권자인 차우셰스크는 무력 진압을 강화하고 군대를 병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대신 수년 동안 스턴쿨레스쿠의 결정이 기존의 음모에 의한 결과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미 암울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유일한 합리적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민간인 사상자 수를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탈출 시도가 실패하고 며칠 후, 차우세스쿠와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임시 군사 재판을 거쳐 처형당했습니다. 차우셰스쿠 사형 집행 후 며칠 동안 1,000명 이상 사망하고 3,000명 이상 부상당했습니다.
그전에 로므니아 군대가 대중에 대한 잔인한 탄압에 연루되었습니다. 독재자의 전투 이전에 시위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군대의 총에 맞았지만 반공 혁명은 군대가 없었다면 확실히 실패했을 것입니다.
스턴쿨레스쿠 장군의 사실상 쿠데타 이후 로므니아 군부는 차우셰스크 정권의 종말을 보장했습니다. 그 이후, 군부는 민간 지도부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전환의 초기 단계부터 군 통치를 확립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첫째, 혁명의 목표는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을 지원하는 것이 었습니다. 둘째, 세계 언론과 여론은 로므니아 사태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한 유형의 독재, 즉 차우셰스쿠의 정권을 다른 유형의 독재, 즉 군사독재로 교환했으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새 정부에서 전직 고위 군 장교에게 제공되는 특권적인 지위 또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경제가 민영화되고 있었습니다. 궁극적인 혁명의 성공은 쿠데타에 의해 보장되었지만루마니아 혁명과 그 여파는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쿠데타는 거의 극적인 체제 변화를 초래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로므니아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기적으로. 1989년 12월의 혁명 이후, 로므니아는 국가 공산주의에서 신흥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겪었습니다. 그 전환기는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로므니아 사람들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구축했습니다.
궁극적으로 1989년 12월 시작된 변화의 결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며, 로므니아는 2004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2007년 1월 유럽연합에도 가입했습니다. 로므니아는 아직까지 서유럽 나라들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편이지만 경제성장율이 높은 편이며 임금율과 생활수준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박정우,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