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루마니아 국경일의 교훈
2015.12.08
냉전 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71년에 북한을 처음 방문할 때 김일성 국가 주석과 돈독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또한 차우셰스쿠는 북한식 독재자 신격화와 주체 사상에 첫눈에 반한 나머지 루마니아를 북한을 닮은 1인 독재 국가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1989년 12월에 유혈적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차우셰스쿠와 아내인 엘레나가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 루마니아가 다른 동유럽 나라들처럼 공산주의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12월 1일은 루마니아 국가 기념일이었습니다. 매년 이 날은 루마니아의 통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루마니아도 과거 한반도처럼 삼국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루마니아내 몰도바와 발라키아의 두 지역 국민들은 투표를 해서 1859년에 같은 왕을 뽑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몰도바와 발라키아는 통일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라는 지방은 오스트리아 – 마쟈르 (헝가리) 제국에 속했기 때문에 20 세기 들어서도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제 1차대전에 참전해 동맹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과 러시아에 합세해 전쟁에 이겼습니다. 그러나 적군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마쟈르 제국과 루마니아 땅에서 싸우면서 많은 루마니아 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루마니아 군인 75만 명 중 약 45%가 사망했고 16%가 부상을 입었고 11%가 실종되었습니다. 제1차대전이 끝난 후에 루마니아 군인 중 약 4분의 1만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다행이도 저의 친할아버지와 외증조할아버지는 가벼운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전투하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전쟁이 루마니아 땅에서 치러지는 바람에 많은 민간인들이 피난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고, 집도 파괴됐습니다. 당시 약 천 만 명의 인구 중 민간인 26만5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마쟈르 제국이 무너진 뒤 트란실바니아는 마침내 루마니아로 통일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18년 신발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이 지역 주민들은 아르바율리아라는 도시에 모여 루마니아의 나머지 두 지역과의 통일을 선언했습니다.
루마니아와 남북한의 경우를 비교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습니다. 루마니아는 천년동안 분단되어 있다가 제1차대전 때 엄청난 희생을 해서 결국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은 약 천년동안 통일국가였지만 일제시대와 제2차대전이 끝난 뒤 분단되었습니다. 트란실바니아가 루마니아로 통일할 때 루마니아의 일반 사람들, 정치인과 학자들은 몇년에 걸쳐, 점진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당장 흡수통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들 모두 천년 통일의 꿈이 워낙 강한 나머지 흡수통일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루마니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살펴보면 오늘날 루마니아 상황은 1918년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동안 루마니아 사람들은 몇 세대에 걸쳐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반 민주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 제2차대전의 고통과 소련의 침략, 그 이후 공산주의 독재에 의한 인권 침해와 식량 위기, 마침내 80년대 후반 공산정권 붕괴에 이은 민주주의 국가로 향한 전진 등등 수많은 것을 겪었습니다.
80년대 후반 루마니아에서 반공산주의 독재 혁명이 일어나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 루마니아 사람들은 국가 기념일을 바꿔야 했습니다. 루마니아 역사를 보면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영토가 세 개로 분열돼 있던 루마니아가 통일된 날이 가장 의미가 깊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인들은 90년대 초부터는 매년 12월 1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남북한도 비극적 역사와 분단을 극복하여 루마니아처럼 통일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낼 날이 멀지 않다고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