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로므니아와 한국 수교를 기념하며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24.04.02
[스칼라튜] 로므니아와 한국 수교를 기념하며 1990년 3월 30일 한국과 루마니아 국교 수립 TV 보도.
/MBC 뉴스 화면 캡쳐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최근 북한의 동맹국인 꾸바 (쿠바)는 한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요즘 경제 강국인 한국은 온 세계를 정복한 한류, 즉 한국 음악, 영화, TV 드라마로 인해 인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냉전시대때 북한의 동맹국과의 수교가 새로운 소식이 아닙니다.  2024년 3월 30일 로므니아(루마니아)와 한국은 수교 34주년을 맞이합니다. 냉전 시대 때 로므니아는 같은 공산주의 독재 국가이던 북한과만 외교관계가 있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9월9일 설립된 지 한달 쯤 지난 1948년 10월28일 로므니아와 북한은 수교했습니다. 로므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북한 독재자 김일성은 1971년6월15일 평양에서 처음 만난 후 아주 긴밀한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차우셰스쿠와 아내 엘라나가 총살을 당한 1989년12년25일 이후 로므니아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향하는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한국은 로므니아에 첫 번째 투자를 한 외국 투자국이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인 대우그룹은 1990년대 중반부터 로므니아 자동차와 조선, 중공업에 대규모 직접투자를 했습니다. 로므니아와 북한의 관계, 또 로므니아와 한국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로므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로므니아의 수도 부꾸레쉬띠(부카레스트)를 평양처럼 군중들이 모여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광장, 거리와 커다란 건물이 있는 도시로 바꿔 놓으려 했습니다. 또 로므니아의 독재자는 북한처럼 '주체사상'을 로므니아에 투입시키려 했기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경제도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와 김일성, 로므니아와 북한 양국 정부 차원의 사이는 좋았어도, 양국 국민들끼리의 교류는 많이 없었습니다. 북한에서 유학 중인 로므니아 대학생들은 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로므니아 유학생들은 북한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생들끼리만 공부하곤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차우셰수크는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인정하여 냉전 시대에 한국과의 수교를 고려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냉전 시대 때부터 로므니아와의 수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1972 11 22, 워싱턴 주재 한국 대사관 참사관은 로므니아 경제 공사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로므니아의 국제통화기금 가입 신청에 찬성하며 로므니아의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지지한다고 통보했습니다


또한 1972 7 30, 뛰르끼예 (터키) 앙카라 주재 로므니아 부대사 미하이 히스테아 (Mihai Hristea) 가 사망했을 때, 로므니아 대사관에서는 조문록이 열렸습니다. 대사관의 설명에 따르면 애도를 표하고 조의록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는 군복을 입고 동양인 외모를 가진 신원 미상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조의록을 살펴본 로므니아 대사관 직원들은 이 '알 수 없는 사람' '알 수 없는 언어,' 즉 한국어로 짧은 글을 썼고 그 아래에 영어로 '대한민국 군 무관'이라고 서명했습니다.


그 당시 로므니아와 북한 관계를 담당하던 김일성대 출신 로므니아 이지도르 우리안 (Izidor Urian) 대사에 의하면 1973 8 26, 김동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이끄는 조선노동당 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로므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사전 준비 없이 루마니아는 대한민국과 관계를 수립하기를 원한다고 직접 통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안 대사가 맡은 통역을 들은 북한 고위 인사는 손을 흔들며 특히 흥분한 목소리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통역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통역되지 않았다, 대통령 동지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 정권의 반대에 의해 차우셰스쿠는 한국과의 수교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로므니아에서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진 3개월 후 로므니아는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때부터 로므니아와 한국의 관계는 로므니아와 북한의 관계보다 훨씬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로므니아에 첫 번째 투자를 한 외국 투자자였습니다. 1990년대 특히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조선, LG전자와 삼성전자는 로므니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1990년대 로므니아에서 생산된 대우자동차는 유럽, 미국, 그리고 일제 자동차와 로므니아 시장에서 심한 경쟁을 하더라도 로므니아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국민차로 인정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은 1980녀대부터 공산주의 국가가 무너질 것을 알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중반부터 한국의 외국어대학에서 수백 명이 뽈스까, 마쟈르, 벌가리아, 로므니아어를 전공해 왔고, 1990년 중반부터 로므니아 대학생들도 로므니아의 여러 대학에서 한국 교수들에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요즘 로므니아에서 많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고, 로므니아에서도 한식집이 생겨 로므니아 사람들도 김치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한류’는 로므니아를 포함한 동구라파 나라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이라 하면 놀라운 경제발전, 스포츠가 발전한 나라, ‘한류의 나라로 생각합니다. ‘북한이라 하면 고난의 행군,’ 아사,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과 미사일, 군사도발과 권력세습만 떠오릅니다.북한 주민들도 35년전 독재를 없앤 로므니아 사람들처럼, 또한 한국 사람들처럼 인권과 경제번영을 누릴 날을 기대해 봅니다.

 

에디터 조진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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