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칼럼] 루마니아 공산주의 붕괴 21주년

그렉 스칼라튜 ∙ 루마니아 출신 언론인
2010.12.21
지난 19일 일요일 한반도 긴장 사태를 조정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긴장 사태는 북한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지난 3월26일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해 한국의 천안함이 침몰해 젊은 한국 군인 26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북한은 올해 비밀요원들을 배치하여 한국으로 망명한 주체사상의 설립자와 이론가이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북한정권의 암살의도는 실패했지만, 87세이던 황장엽씨는 지난 10월10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11월23일 북한은 한국의 땅인 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하여 한국 군인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한국 민간인과 군인 1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북한 도발에 의한 한반도 긴장은 20년전에 끝난 냉전시대의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국제법 인권기준과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거부하고 국제사회에 참여하지 않고, 공산주의 독재세습을 계속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의 분단은 아직까지 냉전시대의 유일한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21년 전인 1989년12월21일과 22일에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냉전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했던 동유럽 나라 루마니아 서부에 있는 티미쉬아라라는 도시에서 1989년 12월 17일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틀이 지난 19일,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이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귀국하여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날 저녁 차우셰스쿠는 텔레비전 방송의 대 국민연설을 통해 티미쉬아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혐오하는 민중의 혁명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외국 비밀 요원들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미 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티미쉬아라의 실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급하게 된 차우셰스쿠는 대 국민연설 이틀 뒤인 21일,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쉬티 중심가에 있는 공산당 본부 베란다에서 수만명의 관중을 대상으로 또 다른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공산당집행위원회가 중요한 법령을 결정했다며 1990년 1월 1일부터 루마니아의 최저임금을 10% 올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민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굶주리고 헐벗게 했던 독재자가 이제와서 임금 몇푼을 올려 주겠다고 떠들어 대는 그러한 사탕발림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날의 군중은 1965년부터 지난 25년동안 차우체스쿠가 연설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쳐댔던 군중들이 아니었습니다. 차우셰스쿠가 연설하는 동안 이들은 "티-미-쉬아-라, 티-미-쉬아-라"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25년동안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국민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차우셰스쿠의 얼굴 표정은 공포로 가득 찼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두려운 나머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최저임금이 오르게 되면 국민 1천500명이 혜택을 볼것입니다…아니, 105만명… 아니, 150만명…" 이렇게 더듬거리는 사이에 사람들은 계속 "티-미-쉬아-라, 티-미-쉬아-라"라고 외쳐댔습니다.

연설을 중계하던 텔레비전 방송은 끊기고, 전기스피커도 꺼졌습니다. 위협을 느낀 차우셰스쿠는 옆에 있던 아내와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공산당 본부건물안으로 즉시 도피했습니다. 그날 밤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그 일당이 공산당 본부 건물안에 피신해 있는 동안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쉬티에서는 반공산주의 혁명이 크게 번졌습니다. 대학생들, 노동자들, 민간인들 다 같이 길가에 나와 밤새도록 전투 경찰, 내무부 군인, 비밀 경찰, 국방부 군인들과 충돌하면서 수백명이 희생되었습니다.

12월 22일 아침 민간인들은 군인들에게 담배와 꽃을 주면서 같이 싸워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자고 설득했습니다. 중앙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바실레 밀레아(Vasile Milea) 국방부 장관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그가 배신자임을 비관해서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혁명대열에 가담한 민간인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죄 없는 사람들을 더이상 죽일 수 없어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루마니아 군인들은 더이상 독재자를 보호해 주지 않고, 민간인과 손을 잡았습니다. 차우셰스쿠의 명령으로 새로운 국방장관이 된 빅토르 스턴쿨레스쿠(Victor Stanculescu) 장군도 더이상 민간인들을 죽이려 하진 않았습니다. 차우셰스쿠는 중국의 천안문 시위때처럼 장갑부대를 동원하여 민간인들을 대학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턴쿨레스쿠 국방장관은 독재자의 명령을 무시하고 부쿠레쉬티 중심가로 다가오고있는 장갑부대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민간인들도 탱크와 장갑차위에 올라가, 군인들과 같이 공산당 본부를 공격했습니다. 민간인 수백명이 문을 부수고 공산당 본부에 들어갔을때는 이미 독재자와 그의 아내가 건물 위에 있는 헬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해방된 루마니아 방송국에서는 독재자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인 엘레나는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헬기 조종사는 미사일에 맞아 추락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헬기를 도중에 착륙시켰습니다. 독재자의 경호원들까지도 민간인들을 죽인 차우셰스쿠를 더 이상 보호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는 몇시간후 루마니아 군에 의해 생포되었습니다.

12월 22일부터 나흘동안 주민들과 군인들은 아직까지 독재자를 지지하는 비밀요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독재자의 비밀요원들은 테러 작전을 세워 공항, 방송국, 국방부, 병원들과 다른 주요 건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루마니아 혁명가들은 ‘루마니아 구세 전선’이라는 단체를 구성해 루마니아 질서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위험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독재자의 비밀요원들의 사격으로 사망한 민간인들과 군인들은 증가했고, 아군에 대한 오발에 의해 희생된 군인들도 많았습니다.

12월 22일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는 루마니아 군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인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는 군사 재판을 받고 사형 당했습니다. 그들이 사망하자 루마니아 전국에서 싸움의 총 소리는 그쳤습니다. 그순간부터 루마니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혁명이후 21여년이 지난 요즘의 루마니아는 온 국민의 생활 수준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라의 미래를 자유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다른 동유럽나라들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군사동맹인 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고 유럽연합에도 가입했습니다. 루마니아는 전환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2001년부터 놀라운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2010년 루마니아도 다른 여러유럽나라처럼 세계금융과 경제상황이 안좋아 경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경제성장율이 좀 떨어지는 것뿐이지 공산주의 시대처럼 식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젠 국제법, 국제인권법과 다른 국제기준을 지키며 유럽연합 가입국인 루마니아는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때문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 상담과 기술원조를 받아 또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21년 전 일어난 루마니아 반공산주의 혁명을 체험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차우셰스쿠 공산 독재 시대의 인권 유린, 식량부족과 전력난을 역사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루마니아 청소년들은 21년전의 컴퓨터, 인터넷, 음악 텔레비전 방송, 해외 여행의 자유가 없었던 시대를 상상도 못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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