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루마니아 ‘개방도시’의 교훈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14.12.16

구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했던 동유럽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25년전인, 1989년 12월 17일 루마니아에서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공산 독재체제가 무너졌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 독재자와 그의 아내는 군사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25년전 루마니아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통해 루마니아는 민주주의로 향하는 전환기에 들어갔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 독재 정부의 비효율적 경제 정책, 독재자의 개인 숭배, 언론 검열, 식량 부족과 인권 유린에 의해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살았습니다. 1989년말 동유럽에서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마쟈르, 체스꼬슬로벤스꼬, 벌가리아와 뽈스까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동서독일의 젊은이들은 베를린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루마니아의 혁명은 12월 17일 루마니아 서부에 있는 티미쉬아라라는 도시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티미쉬아라는 다른 루마니아 도시보다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루마니아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던 유고슬라비아의 국경에 가까웠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소비재가 부족한 루마니아로 밀수품이 들어와 우선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팔리곤 했습니다. 그 당시 인기 좋았던 수입 청바지, 신발, 운동화, 전자손목시계, 전자제품이나 록음악 음반과 테이프를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구입해 다른 루마니아 도시의 암시장에서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티미쉬아라는 중국으로부터 밀수입이 들어오면서 장마당이 활발한 북한의 신의주와 비슷했습니다.

심각한 언론 검열 때문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외국 TV방송을 볼 수 없었지만,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위성 안테나 없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이나 조금 더 개방적인 공산국가 마쟈르와 유고슬라비아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 특히 서독 이민을 갔기 때문에,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이 서유럽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서유럽에서 온 관광객과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은 티미쉬아라를 많이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은 다른 도시보다 티미쉬아라에서부터 알려졌습니다.

1989년 12월 17일 티미쉬아라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반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날 군인과 경찰의 발포로 수 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른 루마니아 도시에 자유유럽방송과 같은 외국 방송을 통해 티미쉬아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결국 반공산주의 혁명이 전국으로 퍼져 군대는 결국 국민의 편에 서고 1989년 12월 25일 차우셰스쿠의 악명 높은 정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혈 혁명이 일어난 동유럽 나라는 루마니아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벌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나 뽈스까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다른 동유럽 공산주의 독재자와 달리 절대적 권력을 포기하지 않고 개혁과 개방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개혁과 개방을 거부했으며, 김씨 일가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세습이 두 번이나 이뤄졌습니다. 김정은 정권하에서 북한이 평화로운 개혁과 개방을 할 기회는 아직도 있습니다. 김씨 일가가 개혁과 개방을 계속 거부하면 북한 주민들, 특히 루마니아 티미쉬아라 주민들처럼 정치탄압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세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주민들이 언젠가 루마니아처럼 자신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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