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고난의 행군에 대한 추억
2020.12.28
며칠 전 북한 TV에서는 고난의 행군시기를 추억한 ‘명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북한의 모든 프로그램이 그러하기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그램은 고난의 행군 시기 당과 수령은 인민을 명줄로, 인민은 당과 수령을 명줄로 잡고 함께 고난을 극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지도자가 얼마나 고생하는 인민들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절절하게 묘사하면서 그 아픔을 딛고 선군을 영도한 지도자가 있어서 조국을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고난의 행군은 아직도 많은 주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고난의 행군을 따서 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수천만 주민들이 겪은 고난의 행군은 100여 명의 유격대원들이 겪은 고난보다 그 크기와 강도가 더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고 땔 것이 없고 약이 없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 친척들과 이웃들을 허무하게 잃었습니다. 군대에 보낸 자식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졌고 부모 잃고 꽃제비가 된 아이들, 돌볼 사람 없는 노인들이 거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한 주민이 몇 명인지 북한당국은 공식적인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적게 잡아도 30만 명은 될 것으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난의 행군이 북한이 주장한 대로 고난의 행군이 제국주의자들의 반사회주의적 책동에 기인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북한 경제는 1980년대부터 급속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함경북도에서는 배급을 제 날짜에 주지 못하기 시작했고 석탄이 없어서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는 이러한 북한 경제에 결정타를 안겼습니다. 그 어떤 세계적인 경제파동에도 끄덕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던 북한 경제는 물먹은 솜처럼 순간에 주저 앉았습니다. 배급이 끊기고 전기가 끊기고 물이 끊겼지만 지도부는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력갱생해서 살아가라는 것이 국가가 내놓은 대책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살기 위해 스스로 시장을 만들고 아득바득 노력할 때 국가는 사회주의를 지킨다면서 오히려 시장을 탄압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주민들을 살릴 대책 마련에 힘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고 일어날까 두려워 살아있는 사람조차 공개 처형했습니다. 수많은 주민들이 죄도 없이 사회적 공포감 조성을 위한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간부들도 있었고, 외국에서 유학한 수재들도 있었고 배고파 고생하던 노동자, 농민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북한이 자랑하는 선군정치였습니다. 반대로 지도부가 고난의 행군 원인이라고 한 미국과 남한이 북한에 제일 먼저, 제일 많은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도 체제개편으로 혼란을 겪었습니다. 일부 나라에서는 내란으로 인명피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처럼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중국은 오히려 1990년대에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결과 주민들의 삶이 바뀌었다면 희생이 덜 원통할 것입니다. 오늘 북한은 1990년대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직 아득히 뒤떨어져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통일된 독일은 2019년 현재 국민소득이 4만 5천 달러에 이르렀고 중국과 러시아도 1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이전 사회주의국가들 중 가장 경제 수준이 낮은 베트남과 우크라이나의 국민소득도 3,400~3,500달러입니다.
남한 주민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 고난의 행군을 했다고 말합니다. 고난의 행군이 북한만의 말이 아닌 세계가 아는 개념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을 오도하다니요? 고난의 행군 때 억울하게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이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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