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오슬로 협정과 한반도

김태우-전 통일연구원장
2023.09.20
[김태우] 오슬로 협정과 한반도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이스라엘-PLO 평화 협정에 서명한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 사이에 서 있는 가운데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오른쪽)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REUTERS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오늘은 30년 전 9월에 있었던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을 회상하면서 한반도 상황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오슬로 협정이란 1993 9 13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줄여서 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클린턴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정원에서 서명한 평화협정입니다. 사전 협상이 오슬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오슬로 협정으로 불립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 PLO는 상호 인정과 평화를 약속하지만, 한반도에서도 그랬듯 이런 약속은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19세기 초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지만, 유대인 이주자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1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이 영국을 돕고, 영국이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힌 후부터 아랍계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발이 폭발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과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운동과 함께 대거 이주해오면서 갈등은 증폭되었습니다.

 

1948 5 14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발표하자 주변 아랍국가들이 일제히 공격에 나서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스라엘은 이후에도 세 차례의 전쟁을 더 겪지만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며 생존에 성공합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 등을 차지했고, 1973년 제4차 전쟁에서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화약고로 돌변한 이 지역의 평화를 위해 많은 중재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하여 1978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화해로 모든 중동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으며,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았습니다. 결국 1987년 제1인티파다(Intifada)’ 즉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무장봉기가 발생하여 이스라엘이 강경 진압에 나서고 새로이 결성된 이슬람 테러단체 하마스가 과격 행동에 나서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PLO 1992 12월부터 비밀협상을 벌였고, 결국 미국의 중재로 1993년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게 됩니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 인정했고 실제로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반대했던 이스라엘 강경세력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되고 국경 획정, 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 처리 등의 난제들로 인하여 오슬로 협정은 흔들리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서안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증가는 결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극했습니다. 또 다시 미국이 나서서 2009년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을 일시 중단시키지만, 2000년 이스라엘의 강경파 정치인 아리알 샤론이 아랍인들이 이슬람의 성전으로 믿는 템플 마운트를 방문하면서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언제든 제3차 인티파다가 일어날 수 있는 폭발성을 머금은 채위험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이런 상황은 한반도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수많은 대화와 합의를 거듭했음에도 합의는 번번이 깨지고 대결과 긴장이 재발하는 현실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1974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상호비방 중지, 이산가족 재회, 교류 등에 합의했을 때, 그리고 1991년 남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고 기본합의서를 통해 상호 체제 인정,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 등에 합의하고 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해 상호 농축과 재처리를 포기하기로 합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2000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을 그랬고, 지상과 해상 그리고 공중에서의 적대행위 상호 중단에 합의했던 9.19 군사합의가 발표되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군사 도발, 사이버 도발, 가상 자산 탈취, 무인기 침투 등은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북한은 비핵화공동선언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 채 농축과 재처리는 물론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한 핵보유국이 되었고, 군사합의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를 계속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동보다 한반도 상황이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동의 갈등에는 체제 대결에 더하여 종교 대결 또는 민족 대결 측면이 가미되어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두 체제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오슬로 협정에 비견되는 수많은 합의와 공동선언이 있었지만 여전히 상생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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